씨받이 종손의 마음을 훔치다 [청구야담]
조선로맨스 - 씨받이 종손의 마음을 훔치다 [청구야담]
돈 때문에 양반가의 씨받이로 들어간 처녀. 원래는 아이만 낳고 떠나야 할 운명이었으나, 병약했던 종손 남편은 처녀의 건강한 생명력과 따뜻한 성품에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첩이 아닌 정식 부인으로 그녀를 맞이하려 집안과 맞서 싸우고, 기적적으로 본처가 양보하여 두 사람은 진정한 가족이 되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고 만수무강했다는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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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사내아이만 낳아주고 미련 없이 떠나면 되는 일이었다." 지독한 가난에 등 떠밀려 명문 양반가의 씨받이로 발을 들인 처녀. 삭막하고 숨 막히는 저택에서 숨죽여 지내던 그녀는 병약하고 외로운 종손 남편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직 대를 잇기 위한 차가운 거래로 시작된 밤, 그러나 처녀의 따뜻한 체온과 다정한 심성은 죽어가던 종손의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고 마는데... 신분과 지엄한 율법의 벽을 넘어선, 조선시대 양반가 담장 너머의 가장 애틋하고 기적 같은 사랑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 1: 가난에 떠밀려 낯선 양반가의 씨받이로 발을 들인 처녀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내려온 맹렬한 칼바람이 문풍지를 날카롭게 찢어놓을 듯 흉포하게 몰아치던 어느 몹시 깊고 혹독한 겨울밤이었습니다. 눈보라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산비탈 아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초가삼간 좁은 방구석에서는, 열병으로 앓아누운 홀어머니의 피 섞인 마른기침 소리와 며칠째 주린 배를 움켜쥔 어린 동생들의 구슬픈 칭얼거림만이 처절하게 메아리치며 맴돌고 있었습니다. 열여덟 살 난 처녀 옥례는 흙바닥의 냉기를 쫓으려 낡고 해진 치맛자락을 동생들의 몸 위로 필사적으로 덮어주고, 구멍 난 창호지 틈으로 짐승처럼 들이치는 눈보라를 제 몸으로 막아보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살을 에는 듯한 가난과 절망의 지독한 한기는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도무지 막아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당장 내일 아침 어린 동생들의 입에 끓여 먹일 거친 피죽 한 그릇, 나무껍질 한 조각조차 남지 않은 절망의 끝자락. 바로 그때, 칠흑 같은 어둠과 거센 눈보라를 뚫고 읍내에서부터 수소문 끝에 힘겹게 찾아온 늙은 방물장수 노파가 옥례의 집 사립문을 거칠게 두드렸습니다. 노파의 품에는 옥례가 평생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묵직하고 거대한 엽전 꾸러미와 최고급 고운 명주 필이 은밀하게 들려 있었습니다.
"옥례야, 안에 있느냐? 네 심청이 뺨치는 갸륵한 효심은 읍내 바닥에 모르는 이가 없지. 내 너와 네 가족의 처지가 너무도 불쌍하고 딱하여, 아주 수지맞고 기가 막힌 자리를 하나 어렵게 물어왔다. 저기 저 산 너머,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바다를 이룬다는 지체 높은 최 대감마님 댁을 너도 익히 알지? 그 댁의 뼈대 있는 삼대독자 종손이 혼인한 지 십 년이 훌쩍 넘도록 후사가 없어, 가문의 대가 끊길 절체절명의 위기란다. 네가 그 댁의 대를 이을 사내아이를 낳아주는 은밀한 '대리모', 즉 씨받이로 들어간다면 이 거대한 재물은 모두 네 어미의 귀한 약값과 동생들의 양식이 될 터. 어찌하겠느냐? 눈 딱 감고 아이만 쑥 낳아주고 미련 없이 돌아오면 되는 일이다. 너희 식구가 모조리 굶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노파의 충격적이고 노골적인 제안에, 바닥에 누워있던 옥례의 어머니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을 저으며 펄쩍 뛰었습니다. 아무리 찢어지게 가난할지언정 반듯하고 정결하게 키운 금쪽같은 처녀 딸을, 돈을 받고 남의 집 씨받이 노리개로 팔아넘길 수는 결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고, 이 몹쓸 노인네야! 내 딸이 어떤 딸인데 씨받이로 가란 말이오! 차라리 우리가 다 같이 굶어 죽고 말지, 내 딸을 시궁창에 밀어 넣을 수는 없소! 당장 그 더러운 돈을 가지고 나가시오!"
어머니는 옥례의 손을 부여잡고 오열했지만, 정작 옥례의 눈빛은 무섭도록 차분했고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퀭하게 푹 꺼진 동생들의 굶주린 눈망울과 밤마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길이 눈앞에 당도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옥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며,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는 어머니를 향해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어머니, 불효막심한 딸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제 한 몸 짐승처럼 더럽혀져서라도 우리 불쌍한 식구들이 이 모진 겨울을 넘기고 온전히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남의 집 담장을 넘어 그 씨를 받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일 것입니다.'
며칠 뒤, 달빛조차 두꺼운 먹구름에 가려 숨죽인 칠흑같이 어둡고 서늘한 밤. 옥례는 화려하게 단장된 비밀스러운 가마에 태워져, 거대하고 위압적인 최 대감 댁의 높은 솟을대문을 남몰래 소리 없이 넘었습니다. 담장 너머의 세상은 옥례가 흙투성이로 살던 산비탈과는 완전히 다른, 화려하지만 숨이 턱턱 막히도록 삭막하고 고요한 차가운 세상이었습니다. 별당의 으슥하고 은밀한 방으로 안내된 옥례 앞에는 서릿발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의 시어머니와,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을 꿇고 눈물만 훔치고 있는 병약해 보이는 본처 민씨 부인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옥례의 몸을 위아래로 날카롭게 훑어보며, 얼음장처럼 차갑고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똑똑히 명심하거라. 너는 우리 뼈대 깊은 가문의 귀한 씨를 품어낼 기름진 밭일뿐, 그 이상의 헛된 꿈이나 정분 따위는 절대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행여라도 우리 종손의 마음에 들려 천박한 여우 짓을 하거나, 집안의 지엄한 법도를 조금이라도 어지럽힌다면 넌 살아서 이 집 대문 밖을 결코 나서지 못할 것이야. 사내아이를 낳는 즉시, 처음에 약조한 남은 재물을 받아 쥐고 밤도둑처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거라. 알아들었느냐?"
"예... 대감마님. 명심, 또 뼛속 깊이 명심하겠사옵니다."
옥례는 차가운 마루 바닥에 납작 엎드려 두려움에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옆에 앉은 본처 민씨 부인의 가느다란 어깨가 서럽게 들썩이며 오열하는 것을 보며, 옥례는 양반가 안방마님의 화려한 비단옷 속에 감춰진 참담하고 비참한 여인의 숙명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십 년 넘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모진 소박을 맞고, 타인인 다른 젊은 여인을 제 지아비의 방으로 억지로 들여보내야 하는 본처의 찢어지는 굴욕과 가슴. 옥례는 자신이 마치 그녀의 인생을 도둑질하는 큰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하녀들의 무표정한 손에 이끌려 차가운 물로 꼼꼼하게 목욕재계를 마친 후, 속살이 고스란히 비치는 얇고 하얀 명주 소복만을 간신히 입은 채, 옥례는 종손이 머무는 안채의 가장 은밀한 방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습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 위를 걷는 듯, 형장으로 향하는 죄수처럼 고통스럽고 무거웠지만, 그녀는 고향의 차가운 방에 굶주려 누워있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방문을 향해 섰습니다.
※ 2: 차가운 별당, 병약한 종손과 생명력 넘치는 처녀의 첫 만남
종손이 머무는 거대한 방 앞. 하녀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뒤로 물러가고, 옥례는 추위와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묵직한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섰습니다. 방 안은 기이할 정도로 썰렁하고 서늘했으며, 숨을 들이쉴 때마다 독하고 쓴 짙은 한약 냄새가 코끝을 강하게 찔러와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깔린 화려한 황금빛 비단 이불 위에는 이 거대한 저택의 주인이자, 옥례가 온몸을 바쳐 아이를 낳아주어야 할 남자, 종손 도영이 초점 잃은 눈으로 힘없이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
옥례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을 쳐다보며 방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숨죽여 바짝 엎드렸습니다. 사대부 양반 사내란 호랑이처럼 무섭고 위압적이며, 짐승처럼 거칠게 다가올 것이라 두려움에 떨며 지레짐작했건만, 조심스레 곁눈질로 훔쳐본 도영의 모습은 옥례의 짐작과 예상을 완전히 처참하게 빗나갔습니다. 도영은 병색이 완연하여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핏줄이 보일 정도로 투명했고, 이불 밖으로 나온 얇은 어깨와 팔목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마르고 가녀렸습니다. 게다가 연신 가슴을 부여잡고 피 섞인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호령하는 양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정심을 자아내는 가여운 죽어가는 병자에 가까웠습니다.
도영은 방구석에서 짐승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옥례의 가녀린 어깨를 보며 깊고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습니다.
"고개를 들라. 이토록 어리고 가녀린 아이가 대체 어쩌다 가난에 떠밀려 이런 춥고 무서운 곳까지 오게 되었단 말이냐. 네 부모의 심정이 오죽했을꼬."
도영의 목소리는 병에 지쳐 힘이 없었으나, 뜻밖에도 옥례의 굳은 마음을 눈 녹듯 녹여낼 만큼 다정하고 한없이 따뜻했습니다. 옥례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도영은 참담하고 괴로운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습니다.
"내 꼴이 몹시 우습고 흉할 것이다. 어머님의 완강한 고집과 핍박을 도저히 꺾지 못해 죄 없는 너를 이 불결한 방에 들이게 하였으나, 보시다시피 나는 내일 죽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몹쓸 몹쓸 병에 걸린 썩어가는 사내다. 나 하나 억지로 살자고 이름 모를 독한 약초를 매일 삼키고, 가문의 대를 억지로 잇겠다고 너 같이 맑고 어린것의 몸을 돈으로 빌려야 하는 내 처지가, 참으로 짐승만도 못하여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 부끄러울 따름이구나. 이리 가까이 오지 말고, 행여 내 병이 옮을까 두려우니 저쪽 구석에 누워 눈을 붙이고 쉬거라. 내일 아침이 밝으면 어머님께는 합궁을 무사히 하였다고 내가 잘 둘러댈 터이니 걱정하지 마라."
도영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찢어질 듯한 기침을 쏟아내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듯 누웠습니다. 쿨럭거리는 끔찍한 소리가 텅 빈 서늘한 방 안을 처절하게 울렸고, 그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결국 검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하얀 요를 붉게 적셨습니다. 보통의 여인이었다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도망치거나 방구석으로 숨었겠지만, 일찍이 병든 어머니의 피고름을 닦아내고 간호하며 험하고 모진 세상을 버텨온 옥례의 본능은 다르게 움직였습니다. 옥례는 천한 여인이 고귀한 양반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지엄한 법도조차 까맣게 잊은 채, 치맛자락을 단단히 여미고 도영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습니다.
"서방님, 방 안의 찬 기운이 폐부를 날카롭게 찔러 기침이 멎지 않고 겉도는 것이옵니다. 제 무례를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옥례는 거칠고 투박하여 굳은살이 배였지만, 펄펄 끓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두 손을 뻗어 도영의 차가운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부드럽게 마찰하며 쓸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꽁꽁 언 얼음장 같던 도영의 마른 가슴팍에, 옥례의 억센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하고 건강한 생명력의 온기가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도영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낯선 천한 여인의 거침없는 손길에 몹시 당황하여 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옥례의 따뜻한 손길이 닿은 곳마다 신기하게도 꽉 막혔던 숨통이 시원하게 트이고 찢어질 듯한 가슴의 통증이 기적처럼 가라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어린 아이의 손은... 참으로 따뜻하고 신비롭구나. 어찌 이리도 억세게 살아 숨 쉬는 대지의 흙과 뜨거운 태양의 온기가 이토록 고스란히 전해진단 말인가.'
도영은 고통 속에서도 옥례의 진지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곱게 단장한 화려한 화장기 아래로 엿보이는 거칠게 검게 그을린 목덜미와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마디. 그것은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라난 양반가 여인들에게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며 들꽃처럼 억척스럽게 살아온 강인한 생명력과 희생정신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면 아니 된다... 내 몸은 부정하고 썩어가고 있어. 너같이 맑고 깨끗한 아이가 어찌 나 같은 시체 같은 사내의 가슴을 문지른단 말이냐..."
도영이 애써 숨을 고르며 옥례를 밀어내려 하자, 옥례는 오히려 그의 서늘하고 뼈만 남은 두 손을 두 손으로 꽉 부여잡으며 맑고 단단한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습니다.
"서방님, 쇤네 비록 빚에 팔려 온 천하고 미천한 몸이오나,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두 눈앞에 두고 어찌 법도를 따지며 제 몸만 비겁하게 사리겠사옵니까. 제가 깊은 산속에서 병든 어미를 돌볼 때 쓰던 비방이옵니다. 제 손이 비록 거칠고 투박하여 거슬리시겠지만, 사람의 체온만큼 이 세상에 좋은 명약은 없다 하였습니다. 서방님의 기침이 완전히 멎고 땀이 날 때까지 제 끓는 체온을 듬뿍 나누어 드릴 터이니, 부디 절 밀어내지 마시옵소서."
옥례는 도영의 식은땀 흐르는 찬 등을 자신의 품으로 감싸 안고 밤새도록 그의 굳은 몸을 억척스럽게 주무르고 끊임없이 뜨거운 온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타인의 맹렬하고 순수한 온기 속에서, 도영은 지난 십 년간 앓아온 지독한 뼛속의 고독과 병마의 서늘한 한기가 봄눈 녹듯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문의 어른들이 그저 대를 잇기 위한 짐승의 도구로만 여겼던 이름 모를 씨받이 처녀가, 죽어가던 앙상한 종손의 메마른 심장에 강렬한 생명의 숨결을 거세게 불어넣은 참으로 기이하고도 애틋한 첫날밤이었습니다.
※ 3: 약을 달이고 온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깊이 스며드는 두 사람
그 운명적이었던 첫날 밤 이후, 옥례와 도영의 관계는 가문이 억지로 맺어준 차갑고 기계적인 계약의 선을 완벽하게 넘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깊고 따뜻하게 스며들며 엮이기 시작했습니다. 별당의 밤은 더 이상 후사를 얻기 위한 짐승 같은 의무의 끔찍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옥례는 밤마다 별당을 찾을 때면, 치마폭 속에 산에서 직접 정성껏 캐온 귀한 약초와 달큰한 대추, 생강, 감초를 남몰래 숨겨 들어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험한 산을 이리저리 누비며 약초를 캐어 동생들을 연명하게 했던 옥례는, 도영의 차가운 병증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독이 되는지 궐내의 콧대 높은 어의들보다 훨씬 더 훤하고 실용적으로 꿰뚫고 있었습니다.
"서방님, 안채 아궁이 불을 몰래 빌려 도라지와 배, 그리고 꿀을 넣고 진하게 달여왔사옵니다. 매일같이 쓴 한약만 억지로 드시어 비위가 상하시고 속이 헐으셨을 터이니, 이 달큰하고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어보시옵소서. 목의 기침을 멎게 하고 찬 속을 덥히는 데에는 우리 산에서 나는 이것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옥례가 작은 사발에 조심스레 담아 내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를 받아 든 도영의 파리한 얼굴에,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맑고 희미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옥례가 달여온 차를 한 모금 들이켤 때면 묘하게도 꽉 막혔던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졌고, 무엇보다 옥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방 안에 짙게 배어있던 죽음 같은 쓴 약 냄새 대신, 향긋한 풀내음과 풋풋한 흙냄새가 진동하여 도영의 불안했던 마음이 한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워졌습니다.
도영은 밤이 깊도록 옥례가 곁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들려주는 밖의 바깥세상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서방님, 저 달빛이 닿는 뒷산 너머에는 어찌나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지 모릅니다. 봄이 오면 그곳 바위틈에 붉은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나는데, 그 꽃을 따다 화전으로 부쳐 먹으면 어찌나 고소하고 달콤한지 그 맛이 기가 막힙니다. 서방님께서도 부디 약을 꼭 챙겨 드시고 병을 툭툭 털고 일어나시면, 쇤네가 곁에서 그 계곡까지 직접 모시고 가 진달래꽃을 한가득 꺾어 화전을 부쳐드리겠사옵니다."
평생토록 이 거대하고 삭막한, 마치 무덤 같은 기와집 담장을 한 번도 훌쩍 넘어서 본 적 없는 갇힌 도영에게, 옥례의 자유롭고 생기 넘치는 이야기는 마치 신비로운 전설 속 이야기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설레게 했습니다. 그녀의 맑고 꾸밈없는 웃음소리와 생동감 넘치는 눈동자는 도영의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젖혔고, 살아갈 이유를 잃었던 그에게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물 흐르듯 흐르면서 도영의 건강은 놀라울 정도로 눈에 띄게 호전되었습니다. 시체처럼 잿빛이었던 뺨에는 붉은 혈색이 돌기 시작했고, 밤새 멈추지 않던 피 섞인 기침은 잦아들었으며, 무엇보다 허공을 헤매며 퀭했던 두 눈에 다시 강렬한 생기가 반짝였습니다. 가문 사람들은 종손이 밤마다 기력을 되찾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며, 새로 들인 건강한 씨받이가 양기(陽氣)를 듬뿍 불어넣어 대통을 이을 완벽한 준비가 되어간다며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도영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가문이 바라는 대통을 잇는 짐승 같은 번식과는 전혀 다른, 거대한 폭풍과도 같은 애틋하고 맹렬한 연정이었습니다. 어느 깊은 밤, 간호에 지쳐 곁에서 새우잠이 든 옥례의 굳은살 박인 투박하고 작은 손을 가만히 쥐어보던 도영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며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습니다.
'이 불쌍하고 고마운 아이가 썩어가던 나를 완벽하게 살렸다. 내 멈춰가던 차가운 심장을 다시 뜨겁게 뛰게 하고, 무의미했던 이 끔찍한 세상을 다시 살아가고 싶게 만들었다. 허나... 이 아이는 내 자식을 낳아주고 나면, 규정된 은자 몇 푼을 쥐고 다시 저 험하고 무서운 세상으로 쫓겨나 평생 홀로 손가락질받으며 고독하게 늙어가야 할 가엾은 운명. 내가 어찌... 내 목숨을 구하고 나를 살린 이 천사 같은 아이를, 단지 씨나 낳고 버리는 도구로 비참하게 전락시킬 수 있단 말인가. 절대 그리 둘 수는 없다.'
도영은 옥례를 향한 자신의 뜨거운 마음이 단순한 연민이나 찰나의 쾌락이 아님을 뼈저리게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과 웃음 없이는 이제 단 하루도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안채의 화려한 방 안에서 이 모든 상황을 숨죽여 예의주시하던 본처 민씨 부인의 마음은 날카로운 칼날에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던 지아비가 기력을 되찾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은 정실로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밤이 되면 지아비가 머무는 별당에서 흘러나오는 낮고 다정하며 행복에 겨운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민씨 부인의 가슴에 날카로운 독 묻은 비수로 깊숙이 꽂혔습니다.
'서방님께서 저리 환하게 소리 내어 웃으시는 모습을 본 지가 강산이 변하는 십 년이 넘었거늘... 천한 씨받이 계집에게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통째로 다 빼앗기셨구나. 대를 잇고 나면 가차 없이 내쫓아야 할 저 아이를, 서방님께서 끝내 놓아주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시면 자식 없는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쫓겨날 자는 저 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일지도 모르겠구나.'
민씨 부인은 차가운 마루에 홀로 주저앉아 숨죽여 소리 없는 피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완고한 신분제와 율법이 지배하는 거대한 양반가의 담장 안에서, 병약했던 종손과 생명력 넘치는 천한 씨받이 처녀, 그리고 자식을 낳지 못한 죄인인 본처의 엇갈린 비극적인 운명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고도 위태롭게 마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옥례가 불어넣은 생명의 맹렬한 온기는, 이 집안의 수백 년 묵은 굳건한 율법을 송두리째 뒤흔들 거대한 지진과 균열의 시작이었습니다.
※ 4: 처녀의 회임과 이별의 그림자, 신분을 뛰어넘은 종손의 고뇌
옥례가 최 대감 댁의 굳게 닫힌 솟을대문을 넘어 별당에 들어온 지, 어느덧 모진 겨울과 꽃 피는 봄이 지나 반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습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가 따스하게 녹고, 담장 너머로 연분홍 살구꽃이 눈이 부시도록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어느 따스한 봄날 아침. 여느 때처럼 도영의 약을 달이려 자리에서 일어서던 옥례는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극심한 현기증과 함께 속이 뒤집히는 헛구역질을 하며, 차가운 마루 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듣고 황급히 안채에서 별당으로 달려온 늙은 어의가 조심스레 옥례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고는, 굳어있던 주름진 얼굴에 환한 화색을 띠며 안채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시어머니를 향해 목청 높여 크게 소리쳤습니다.
"크나큰 경사 났사옵니다, 대감마님! 종손 마님! 별당의 씨받이 아기씨께서 마침내 가문이 애타게 기다리던 귀한 태기(胎氣)를 보이셨사옵니다! 맥이 아주 구슬 굴러가듯 빠르고 힘차게 뛰는 것이, 틀림없이 최씨 가문의 대를 굳건히 이을 장군감 같은 떡두꺼비 사내아이의 맥이옵니다! 축하드리옵니다!"
어의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거대하고 적막했던 저택 전체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로 발칵 뒤집혔습니다. 십 년 넘게 아이 울음소리가 끊겨 대가 영영 끊길 뻔했던 가문에 마침내 새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소식에, 그토록 엄하고 차가웠던 시어머니는 체면도 잊은 채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조상님들께 엎드려 감사 기도를 올렸고, 하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온 집안이 들썩이는 기쁜 소식 앞에서도, 정작 이 잉태의 당사자인 세 사람의 얼굴에는 짙고 서글픈 잿빛 그늘만이 무겁게 드리워졌습니다. 방 안에서 홀로 남겨진 옥례는 아직 부르지도 않은 자신의 납작한 배를 두 손으로 소중히 어루만지며, 소리 없이 굵은 피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내 뱃속에... 서방님의 핏줄이, 내 아이가 자라고 있다니... 허나 이 가여운 아이가 열 달 뒤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나는 이 핏덩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내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채 그날로 당장 짐승처럼 영영 쫓겨나야 하는구나. 차라리 회임하지 않았더라면, 아기를 갖지 않았더라면 서방님 곁에서 며칠이라도 더 온기를 나누며 머물 수 있었을 텐데... 아가야, 미안하다. 네 어미는 널 안아줄 수 없는 천한 목숨이구나...'
옥례에게 회임의 기쁜 소식은 역설적이게도 곧 다가올 도영과의 영원하고 잔인한 이별을 알리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한편, 건너편 사랑채에서 홀로 붓을 쥐고 있다가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도영 역시, 대를 이었다는 기쁨보다는 가슴이 날카로운 칼날에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과 절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옥례가 내 아이를 가졌으니, 이제 율법에 눈이 먼 어머님은 옥례가 달이 차올라 몸을 풀자마자 돈 몇 푼을 쥐여 미련 없이 내쫓으려 하실 것이다. 다 죽어가던 나를 살려내고 내 아이를 소중히 품은 여인을, 짐승처럼 씨만 받고 차가운 길거리에 버리다니... 그럴 수는 없다. 절대 그리 두지 않겠다. 내 목숨을 걸고, 가문의 모든 율법을 거스르고서라도 옥례와 내 아이를 내 곁에서 온전히 지켜낼 것이다!'
도영은 쥐고 있던 붓을 거칠게 꺾어 바닥에 던지며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앓아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던 병약하고 무기력한 껍데기뿐인 종손이 아니었습니다. 옥례의 헌신적인 사랑과 밤낮없는 보살핌으로 몸도 마음도 몰라보게 강건해진 그는, 가문의 낡은 악습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독한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안방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 모든 경사를 전해 들은 본처 민씨 부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이 무너진 듯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결국... 결국 내 운명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저 천한 씨받이 아이가 단숨에 대통을 이을 아들을 낳았으니, 십 년간 뼈 빠지게 수발만 들고 자식 하나 낳지 못한 이 못난 정실은, 이제 이 집안에서 숨을 쉴 자리조차 없겠구나. 게다가 서방님의 마음마저 온통 저 아이에게 가 있으니, 시어머니가 아이를 핑계로 나를 소박놓고 쫓아낸다면 내 비참한 인생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민씨 부인의 가슴 속에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에 대한 슬픔을 넘어, 젊고 건강한 옥례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과 뼈저린 패배감이 독사처럼 똬리를 틀며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밤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열하며, 자신의 기구하고 잔인한 운명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며 독한 마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 5: 씨받이가 아닌 정실로 맞이하려는 종손의 폭탄선언과 가문의 발칵
달이 차올라 옥례의 배가 남산만 해지고 산달이 가까워질수록, 거대한 기와집 저택 안의 공기는 마치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듯 몹시 위태롭고 팽팽한 긴장감으로 꽉 차올랐습니다. 시어머니는 매일같이 잉어와 산삼을 다려 별당을 찾아와 옥례에게 귀한 보양식을 억지로 입에 떠 넣어 먹이면서도, 서늘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섬뜩한 경고를 잊지 않았습니다.
"배가 이리 남산만 하게 부르고 뾰족한 것을 보니 틀림없는 떡두꺼비 같은 사내아이구나. 몸조리 단단히 잘하여 가문의 대통을 무사히 건강하게 순산하거라. 네가 사내아이를 낳아 내 품에 안겨주는 그 즉시, 처음에 방물장수와 약조했던 은자 백 냥에 수고비로 백 냥을 더 얹어 두둑이 줄 터이니, 입을 꾹 다물고 밤도둑처럼 미련 없이 네 고향으로 떠날 채비를 하여라. 행여 아이 얼굴을 보려 하거나 질척거린다면 네 목숨을 온전히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어머니의 잔인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축객령에, 옥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배를 감싸 안고 눈물만 꿀꺽 삼킬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굳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시어머니의 방을 찾아간 도영이, 가문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율법을 무너뜨릴 엄청난 폭탄선언을 던졌습니다.
"어머님! 옥례가 아이를 낳더라도 저는 결코 그 아이를 이 집 밖으로 내쫓을 수 없사옵니다! 옥례는 제 죽어가던 병을 고쳐준 생명의 은인이자 제 귀한 아이를 품은 어머니입니다. 옥례를 한낱 더러운 씨받이로 쓰다 버리는 짐승 같은 짓을 어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옥례를 곁에 두고 정식 첩실로, 아니 본처 다음가는 정실로 당당히 맞이하여 평생 함께 가족으로 살겠사옵니다!"
도영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에 시어머니는 기가 막혀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갈 뻔했습니다.
"무, 무엇이라! 네 놈이 정녕 정신을 잃고 미친 게로구나! 뼈대 있는 명문 사대부 양반가 종손이, 천하디천한 족보도 없는 씨받이 계집을 정실로 앉히겠다니! 가문의 드높은 명예에 똥칠을 하고 조상님들 얼굴에 먹칠을 할 작정이냐! 당장 그 더러운 입을 다물고 헛소리를 멈추지 못할까!"
"어머님! 가문의 알량한 명예가 사람의 도리보다, 인간의 목숨보다 정녕 중하단 말씀이십니까! 저를 그 끔찍한 병마의 지옥에서 건져낸 것은 어머님의 기도가 아니라, 옥례의 그 거칠고 억센 따뜻한 손길이었습니다. 옥례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미 차가운 무덤 속에 묻혀 뼈만 남았을 것입니다. 제 뜻을 꺾으시려거든 차라리 어머님 손으로 저를 죽이시옵소서!"
모자의 분노에 찬 고성이 고요하던 안채를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가문의 율법과 명예를 목숨처럼 지키려는 시어머니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은인을 지키려는 종손의 팽팽하고 거친 대립은 한 치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끔찍한 소동을 문밖에서 숨죽여 엿듣고 있던 본처 민씨 부인의 심장은 날카로운 비수에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지아비가 천한 씨받이를 정실로 맞이하겠다며 어머니에게 목숨을 걸고 반항하는 모습은, 그녀에게 남은 안방마님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참히 짓밟아버렸습니다.
'서방님께서 이제 나를 완전히 버리고 저 천한 계집을 안방에 앉히시려 하시는구나. 그래, 자식 하나 못 낳는 못난 죄인인 내가 죽어주어야 저 두 사람이 방해물 없이 행복해지겠지. 내 꼴이 이리 비참해졌는데 살아 무엇하리. 차라리 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끔찍하고 비참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리라.'
절망의 끝 벼랑에 내몰린 민씨 부인은 텅 빈 눈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혹시 몰라 헛간 구석 항아리 밑에 꽁꽁 숨겨두었던 맹독인 하얀 비상(砒霜) 봉지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녀는 눈물이 범벅으로 얼룩진 얼굴로 하얀 비상 가루를 찻잔에 조심스레 모두 털어 넣고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을 흘리며 독이 든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마님! 안 되옵니다! 절대 아니 되옵니다! 제발 이러지 마시옵소서!"
방문을 거칠게 찢어질 듯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온 누군가가, 민씨 부인의 손을 세차게 내리치며 찻잔을 빼앗았습니다. 쨍그랑! 찻잔이 방바닥에 산산조각이 나며 흰 독약이 흩어졌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민씨 부인의 발밑에 철퍼덕 털썩 주저앉아 짐승처럼 오열하는 사람. 남산만 한 만삭의 무거운 배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몰아쉬는 옥례였습니다.
"마님, 제발 아까운 목숨만은 버리지 마시옵소서! 마님께서 이러시면 쇤네는 천벌을 받아 죽사옵니다! 쇤네가 떠나겠사옵니다. 아이만 낳으면 어머님 약조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이니, 부디 마님께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방님 곁에서 안방마님으로 오래오래 살아주셔야 하옵니다! 제발 목숨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 6: 본처의 기적 같은 양보와 화합,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품은 해피엔딩
옥례는 차가운 방바닥에 납작 엎드려 민씨 부인의 고운 비단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꽉 부여잡고, 목에서 피를 토하듯 처절하게 오열했습니다.
"마님, 쇤네는 처음부터 이 귀한 집에 헛된 욕심이나 자리를 탐하고 품어 온 것이 절대 아니옵니다. 그저 굶어 죽어가는 제 불쌍한 어미와 어린 동생들을 하루라도 더 살리기 위해 짐승처럼 제 몸을 팔았을 뿐... 서방님께서 제게 너무도 과분하고 따뜻한 마음을 주신 것은 쇤네의 복이 아니라, 제 분수를 모른 씻을 수 없는 큰 죄이옵니다. 마님께서 제 이 못난 죄 때문에 억울하게 목숨을 끊으신다면, 쇤네는 하늘의 천벌을 받아 당장 뱃속의 아이와 함께 끔찍한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제발 헛된 마음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옥례의 진심 어린 처절한 통곡과 뼈를 깎는 애원에, 죽음을 결심했던 민씨 부인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닥에 엎드린 옥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자신을 내쫓으려 한다고 오해하여 질투와 증오로 가득 차올랐던 그녀의 두 눈에서 어느새 날 선 분노가 사그라지고, 형언할 수 없는 굵은 눈물이 둑이 터진 듯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자신을 몰아내고 정실 자리를 꿰차며 비웃을 줄 알았던 천한 씨받이 계집이, 오히려 원수 같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과 다름없는 무거운 만삭의 몸으로 찬 바닥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민씨 부인은 떨리는 두 손을 뻗어 옥례의 거칠고 굳은살 박인 두 손을 조심스레 맞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울지 마라... 네가 대체 내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어미를 살리려 이 험하고 서슬 퍼런 곳에 홀로 온 너의 그 지극하고 갸륵한 효심을, 내가 곁에서 지켜보며 어찌 모르고 외면했겠느냐. 나야말로 자식을 낳지 못해 지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헛된 열등감과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귀한 새 생명을 품고 지아비를 살려낸 너를 시기하고 원망한 속이 좁고 옹졸한 여인이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 지아비는 벌써 병마에 꺾여 차가운 무덤 속에 있었을 터, 네가 내 지아비를 살린 이 가문의 진정한 은인이다. 내가 어찌 너를 내쫓으라 하겠느냐."
민씨 부인의 눈물 어린 따뜻하고 진심 어린 말에 옥례는 소리 내어 짐승처럼 엉엉 울었고, 율법과 신분의 벽에 갇혀있던 두 여인은 서로를 꽉 부둥켜안고 묵은 체증이 씻겨 내려가듯 서러운 눈물을 한참 동안 쏟아냈습니다. 본처와 씨받이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의 굴레가 빚어낸 오해와 증오, 질투가,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뼈저린 연민과 따뜻한 이해 속에서 봄눈이 녹듯 아름답고 거룩하게 녹아내리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며칠 뒤, 이 모든 눈물겨운 사연과 목숨을 건 소동을 전해 들은 시어머니는, 며느리 민씨 부인의 바다 같은 넓은 아량과 옥례의 욕심 없는 고운 심성에 깊이 탄복하여, 마침내 얼음장 같던 굳은 고집을 꺾고 하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가을의 풍요로움이 마당에 가득한 어느 맑은 날, 옥례는 온 집안의 애타는 기다림과 기도 속에, 안방에서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가문의 대를 든든하게 이을 떡두꺼비 같은 건강한 사내아이를 무사히 순산했습니다.
아이가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자, 집안에서는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옥례는 돈 몇 푼을 받고 쓸쓸히 쫓겨나는 대신, 민씨 부인의 간곡한 청과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허락 아래 도영의 정식 부실(副室), 즉 호적에 오르는 첩실로 당당히 가문의 호적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거대하고 철옹성 같던 신분과 율법의 장벽을 뛰어넘어, 오직 인간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끈끈하고 따뜻한 인간애로 이뤄낸 가슴 벅차고 기적 같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세월이 물 흐르듯 흘러, 옥례가 낳은 아들은 누구보다 총명하고 건강하게 자라 가문을 과거 급제로 번창시켰습니다. 옥례는 자신을 거두어준 본처인 민씨 부인을 깍듯하게 형님으로 모시며 두 여인은 친자매보다 더 의좋게 지냈고, 병을 완전히 떨쳐내고 장사가 된 도영은 두 부인 사이에서 평생 웃음이 끊이지 않는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지독한 가난에 등 떠밀려 짐승처럼 피눈물로 양반가의 담장을 넘었던 씨받이 처녀. 그러나 그녀가 그 차가운 집안에 품고 온 것은 단지 가문의 핏줄을 잇는 씨앗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병든 사람들의 심장을 뜨겁게 녹인 생명력 넘치는 따뜻한 온기, 그것은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시작되어 가장 높고 굳건한 양반가의 율법 담장을 완벽하게 허물어버린 위대하고도 눈부신 사랑의 벅찬 기적이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대를 잇기 위해 거래로 만난 두 사람, 씨받이 처녀와 병약한 종손. 신분과 율법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도 피어난 이들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질투를 넘어 서로를 보듬어 안은 본처와 옥례의 아름다운 화해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진정한 사랑과 따뜻한 마음씨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훈훈한 옛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가슴 깊이 와닿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잊지 마시고요, 다음 시간에도 마음을 울리는 따뜻한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