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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을 신랑으로 맞은 판서의 딸 [계서야담]

조선 로맨스 2026. 7. 22. 07:08

도둑을 신랑으로 맞은 판서의 딸 [계서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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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300자 미만)

밤마다 판서댁 곳간 자물쇠가 감쪽같이 떨어져 나갔다. 벼르고 별러 잠복한 끝에 마주한 도둑놈. 그런데 이 사내, 훔치라는 쌀은 뒷전이고 내 혼을 쏙 빼놓는다. 낡은 복색에 감춰진 수려한 외모, 달빛 아래 빛나는 오만한 눈빛까지. 비루한 도둑인 줄 알았더니 붓을 쥐여주니 천재가 따로 없다. 이 발칙하고 배짱 두둑한 사내, 관아로 넘기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내 오늘 밤, 곳간 쌀 대신 이 사내를 훔쳐야겠다."

※ 1: 달빛 아래 덜미를 잡힌 도둑

깊은 밤, 장안에서 가장 드높다는 호조 판서댁의 솟을대문 안쪽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낮 동안 부산하게 움직이던 노비들도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간간이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적막을 깰 뿐이었다. 하지만 뒤뜰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곳간 앞은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 아름드리나무 그림자 아래에는 서늘한 눈빛을 빛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바로 이 집안의 금지옥엽, 판서댁 외동딸이었다.

요 며칠,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밤마다 곳간의 튼튼한 쇳대가 감쪽같이 끊어지고 안의 곡식이 축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건장한 사내종들을 풀어 밤새 경비를 서게 했지만, 도둑은 비웃기라도 하듯 감쪽같이 쌀가마니를 훔쳐 달아났다. 무능한 종년놈들을 믿을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치마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직접 은장도를 품에 지닌 채 잠복을 자처했다. 평소 사내 못지않은 담력과 지략을 지녔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그녀에게, 이 정체불명의 도둑은 불쾌한 불청객이자 묘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하였느냐. 내 오늘 그 귀신의 멱살을 단단히 쥐어 흔들어주마.'

밤공기가 차갑게 뺨을 스쳤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푸르스름한 빛이 기와지붕을 타고 흘러내리던 그때였다. 담장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도 없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그림자는 잠시 주위를 살피는 듯하더니, 거침없이 곳간 쪽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곧은 자세, 훔치러 온 도둑치고는 지나치게 당당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였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나무통 뒤에서 사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사내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곳간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찰칵, 하는 아주 미세한 금속음과 함께 무쇠 자물쇠가 어이없이 툭 떨어졌다. 그가 곳간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그녀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겁도 없이 또 기어들어 왔느냐."

서늘하고도 청아한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놀라서 달아나거나 살려달라 빌 줄 알았던 사내는, 뜻밖에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사내의 얼굴 위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낡고 해진 검은 도포 자락, 헝클어진 상투. 영락없는 빈한한 몰락 양반의 행색이었으나, 그 이목구비만큼은 숨이 멎을 듯 수려했다. 날렵한 턱선 위로 뻗은 오뚝한 콧날, 그리고 짙은 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당혹감 대신 짙은 흥미를 담고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도둑질을 하다 들킨 자의 눈빛이 어찌 저리 오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조금의 흔들림도 내보이지 않고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 달빛에 번쩍였다.

"당장 바닥에 엎드려 포박을 받지 못할까. 내 소리 한 번이면 건장한 장정 스무 명이 당장 튀어와 네놈의 뼈도 추리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오히려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낡은 도포에서 묵향과 흙내음이 섞인 묘한 체향이 풍겨왔다.

"참으로 담대한 아기씨십니다. 깊은 밤, 흉악한 도적을 마주하고도 이리 호통을 치시다니요. 허나, 소리치지 않으실 거라는 걸 압니다."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를 기분 좋게 울렸다.

"무엇이라?"

"정말 저를 관아에 넘길 작정이셨다면, 진작에 종들을 불렀겠지요. 굳이 이 밤이슬을 맞으며 홀로 저를 기다리신 연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훔쳐 간 쌀이 어디로 갔는지, 혹은 제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시다거나 말입니다."

정곡을 찔린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 사내는 보통의 좀도둑이 아니었다. 말씨는 유려했고, 그 안에 담긴 논리는 명석했다. 가난에 찌들어 남의 집 담을 넘는 신세이면서도, 뼈대 있는 양반의 기골과 학식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녀는 은장도를 거두지 않은 채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말솜씨가 제법이구나. 그래, 양반 행세를 하는 도둑놈이라. 변명이나 한번 들어보자.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느냐."

사내는 쓸쓸하면서도 초연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늙고 병든 노모가 사흘을 굶으셨습니다. 글 읽는 선비의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배를 채울 수 없어, 이리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지요. 허나, 판서댁 곳간의 쌀 백 가마니 중 제가 가져간 한 가마니는 백성들의 피와 땀이 엉긴 세곡이 아닙니까. 어차피 썩어 나갈 재물, 가난한 자가 조금 빌려 썼다 생각하면 어떠하신지요."

사내의 당돌한 궤변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도둑질을 정당화하는 뻔뻔함에 화가 나야 마땅하거늘, 어째서인지 그 유창한 언변과 서글픈 눈빛에 가슴 한구석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관아에 넘기면 곤장을 맞고 옥사할 터. 이만한 기개와 인물을 지닌 자가 도둑질로 목숨을 잃기엔 너무도 아깝지 않은가.'

그녀의 머릿속에 전에 없던 발칙한 계획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은장도를 거두어 품에 넣고는 사내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좋다. 네놈의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입만 산 사기꾼인지 내 직접 확인해야겠다. 날 따라오너라."

"예? 어디로 말입니까?"

처음으로 사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뒤뜰의 좁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작게 속삭였다.

"내 방으로."

※ 2: 필묵으로 겨루는 은밀한 심문

안채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아기씨의 별당. 아무도 모르게 도둑을 자신의 방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에 그녀의 심장이 잘게 뛰었지만, 걸음걸이만큼은 여전히 당당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걸어 잠그고 화로에 남은 불씨를 살려 밀랍 촉대에 불을 밝혔다. 방 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던 매화 향과 백단향이 사내의 몸에서 나는 서늘한 밤공기와 뒤섞여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내는 여인의 내밀한 방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 적잖이 당황스러운지, 문가에 우뚝 선 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방 안은 사치스럽지 않으나 기품이 흘렀고, 특히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서안과 서책들은 보통의 규수 방이라기보단 선비의 사랑방을 방불케 했다.

"무엇을 멍하니 서 있느냐. 이리 와 앉아라."

그녀가 서안 앞의 보료를 가리키며 명령조로 말했다. 사내는 멈칫하더니 이내 고분고분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밝은 불빛 아래서 마주한 사내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오랫동안 굶주린 탓에 뺨은 헬쑥했지만, 눈빛만큼은 별빛을 박아 넣은 듯 형형했다.

그녀는 서랍을 열어 최고급 옥돌 벼루와 먹, 그리고 질 좋은 한지 한 장을 꺼내어 사내 앞에 탁 내려놓았다.

"네가 글 읽는 선비라 하였느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되었다고."

"그렇습니다만."

"그럼 증명해 보아라.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 종이 위에 네놈의 심경을 담은 시를 한 수 적어 보아라. 만약 그 글월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당장 아버님께 고하여 널 관아로 끌고 가게 할 것이다."

그녀의 당돌한 제안에 사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비루한 도둑놈을 잡아다 포도청에 넘기기는커녕 시를 지어보라며 필묵을 내어주는 양반댁 아기씨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여인이었다.

"목숨이 달린 시험치고는 너무도 고아(高雅)하군요."

사내는 군말 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을 가는 사내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고, 굳은살이 박인 길고 마디 굵은 손가락이 먹을 쥔 모양새가 묘하게 색정적으로 다가왔다. 사스락, 사스락. 고요한 방 안에 먹이 갈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녀는 턱을 괸 채 그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단정하게 내려앉은 사내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그녀의 목덜미로 원인 모를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했다.

이윽고 붓을 든 사내가 거침없이 화선지 위로 먹물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머뭇거림 하나 없이 유려하게 뻗어 나가는 필체는 웬만한 명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힘이 넘치면서도 기품이 서려 있었다. 붓끝이 종이를 스칠 때마다 사내의 단단한 팔뚝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그 글귀를 확인하기 위해 무심코 몸을 기울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훅 좁혀졌다. 사내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지자, 사내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사내 역시 갑자기 다가온 그녀의 기척에 붓을 쥔 손을 멈칫했다.

'가까이서 보니, 이마가 아주 반듯하고 콧대가 옥을 깎아놓은 듯하구나. 숨소리마저 이리 기분 좋을 일인가.'

그녀는 애써 일어나는 잡념을 억누르며 종이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가을바람 소슬한데 빈 방엔 달빛만 차갑고 (秋風蕭瑟空房冷)
뜻을 품은 장부는 초야에 묻혀 늙어가는구나 (壯志凌雲草野老)
도척의 무리가 부귀를 누리는 이 탁한 세상 (盜蹠之徒享富貴)
명주를 훔치려다 옥토끼를 품에 안은 격이로다 (欲竊明珠抱玉兎)

시를 다 읽어 내려간 그녀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앞의 두 구절은 세상을 향한 몰락 양반의 서글픈 한탄과 원대한 포부를 담고 있었으나, 뒤의 두 구절이 문제였다. 썩어빠진 탐관오리들(도척)을 비꼬는 동시에, 재물을 훔치러 왔다가 달나라의 옥토끼, 즉 아름다운 여인을 마주했다는 은근한 희롱이 섞여 있지 않은가.

"너, 네놈이 감히!"

그녀가 발끈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사내 역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코끝이 스칠 듯 가까웠다. 얽혀드는 시선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사내의 깊은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그녀의 입술을 한 번 훑고는 다시 눈을 마주해왔다.

"시를 지으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제 솔직한 심경을 담았을 뿐입니다. 쌀을 훔치러 왔으나, 정작 제 마음을 도둑맞은 것 같아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지요."

농을 던지는 사내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의 호흡 역시 조금 가빠져 있었다. 그녀는 화를 내야 마땅한 상황임에도, 그 뻔뻔하고도 매혹적인 시선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한평생 규방에 갇혀 사서삼경이나 읽으며 따분하게 살아온 그녀의 세상에, 이토록 위험하고 자극적인 사내는 처음이었다.

'이 사내를 어찌할까. 내쳐야 하나, 아니면…'

두 사람의 숨결이 아슬아슬하게 섞여드는 찰나, 방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기씨! 일어나 계십니까! 곳간이 또 털렸사옵니다! 자물쇠가 부서져 있고, 도둑놈이 필시 집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니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시옵소서!"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녀 역시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평화롭던 공기가 산산조각이 나고, 차가운 현실이 문밖까지 들이닥친 순간이었다.

※ 3: 비좁은 벽장 속, 숨 막히는 온기

"곳간 쪽은 다 뒤져보았느냐! 안채 쪽으로 숨어들었을지 모르니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라!"

아버지의 호통 소리와 함께 횃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 종놈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별당 앞마당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사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창호지 밖의 동태를 살폈다. 마당에 일렁이는 붉은 횃불 그림자가 그의 굳은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아무래도 제가 화를 자초한 듯합니다. 아기씨께 누를 끼칠 수는 없으니, 이쯤에서 나가보겠습니다."

사내가 서둘러 도포 자락을 여미며 방문을 열려 하자, 그녀가 다급히 사내의 소매를 낚아챘다.

"미쳤느냐? 지금 나가면 독안에 든 쥐다. 우리 집 종놈들은 아버지의 불호령에 눈이 뒤집혀 있다. 네놈이 아무리 날래다 한들, 저 많은 인원을 뚫고 담장을 넘을 수는 없어. 당장 몽둥이찜질을 당해 반죽음이 될 것이다."

"허나, 이대로 이 방에 있다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아기씨의 명예는 어찌 됩니까. 처녀의 방에서 외간 남자가 나왔다간 집안이 발칵 뒤집힐 텐데요."

"그걸 아는 놈이 그리 여유를 부렸더냐! 잔말 말고 내 시키는 대로 하라."

그녀는 다급하게 방 한구석에 있는 묵직한 오동나무 이불장 쪽으로 사내를 밀어붙였다.

"아기씨, 문밖에 계십니까? 제가 들어가서 지켜드리겠사옵니다!"

문밖에서 몸종 향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기세였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이불장의 문을 활짝 열고 사내를 우겨넣었다. 층층이 쌓인 명주 이불과 솜요 때문에 공간은 턱없이 비좁았다. 건장한 사내 하나가 들어가자 빈틈이 전혀 없었다.

"아기씨, 문 엽니다요!"

철컥, 문고리가 흔들리는 소리에 그녀는 앞뒤 잴 것 없이 이불장 안으로 몸을 던져 넣고는 쾅, 문을 닫아버렸다.

완벽한 어둠.
먼지 섞인 비단 냄새 틈으로 두 사람의 가빠진 숨소리만이 얽혀들었다. 비좁은 벽장 안에서 사내와 그녀의 몸은 단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있었다. 사내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그녀의 얼굴이 파묻혔고, 사내의 억센 두 팔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와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고 있었다.

끼익-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기씨? 어라, 어디 가셨지? 불은 켜져 있는데…"

향이가 방 안을 기웃거리는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벽장 안의 두 사람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돌처럼 굳어 있었다. 사내의 가슴팍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 고동 소리가 그녀의 뺨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쿵, 쿵, 쿵. 그것이 사내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틈새로 들어온 희미한 빛에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사내는 행여나 그녀가 숨소리를 낼까 봐 큰 손으로 그녀의 입을 조심스럽게 틀어막고 있었다.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바닥이 부드러운 입술을 짓누르는 감각. 그 거칠고도 뜨거운 감촉에 그녀의 아랫배에서부터 찌릿한 전율이 피어올랐다.

사내 역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제 품에 빈틈없이 안긴 여인의 몸은 놀라울 만큼 작고 부드러웠다. 은은하게 풍기는 매화 향기와 여인의 옅은 체향이 비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며 이성을 마비시켰다. 여인의 봉긋한 가슴이 숨을 쉴 때마다 자신의 흉부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자, 사내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미치겠군.'

사내는 속으로 신음하며 시선을 돌리려 했으나, 바로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 눈빛에는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이 아슬아슬한 상황을 즐기는 듯한 기묘한 열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아기씨, 뒷간에 가셨나? 일단 나가서 기다려야겠다."

다행히 향이가 밖으로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방문이 다시 닫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엉켜붙은 몸을 떼어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참았던 숨을 토해내자, 사내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이마와 귓바퀴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사내의 손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와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원초적인 끌림이었다.

"…나갔습니다."

사내가 속삭였다. 쉰 듯이 갈라진 목소리가 그가 얼마나 이 순간을 간신히 인내하고 있는지를 대변해 주었다.

"알고 있다."

그녀 역시 몽롱해진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은 채 떨리고 있었다. 밀착된 사내의 아랫도리 근처에서 묵직하고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처녀의 몸이라 남녀 간의 일에 무지하다 하나, 짐승처럼 억눌린 사내의 본능적인 변화까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내의 턱 끝을 바라보았다. 이 가난하고 뻔뻔하며, 천재적인 글재주를 지닌 아름다운 사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호기심과 동정심에 숨겨주었을 뿐인데, 좁은 벽장 속에서 숨을 섞고 체온을 나누다 보니 완전히 다른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 빼앗긴 곡식의 대가로는 이 사내 하나면 충분하리라. 내 오늘 밤, 이 자를 기꺼이 남편으로 맞이하겠다.'

그녀는 사내를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까치발을 들어 사내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이 빚은… 네놈의 평생을 바쳐 갚아야 할 것이다."

사내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지는 순간,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사내의 입술에 거침없이 포개어졌다. 비좁고 어두운 이불장 안, 밖에서는 횃불을 든 자들이 도둑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그 밤. 가장 위험하고도 은밀한 입맞춤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4: 신랑감으로 점찍다, 발칙한 동거

어둠이 짙게 깔린 별당 안,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거칠게 맞닿았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자, 은은한 달빛이 스며든 방 안에는 두 사람의 가빠진 숨소리만이 얽혀들었다. 비좁은 이불장 안에서 뿜어져 나오던 지독한 열기가 무색하게, 서로의 몸이 떨어지자 서늘한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그녀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애써 식히며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방금 전 벽장 속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생면부지의 도둑 사내와 살을 맞대고 입술을 탐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후회나 수치심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달빛 아래 드러난 사내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눈앞에 앉은 이 사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맹렬한 소유욕과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을 뿐이다.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양반 행세를 하니 이름 석 자는 있을 터."

사내는 방금 전의 입맞춤으로 인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굶주림에 지쳐 남의 집 담을 넘은 주제에, 여인의 당돌한 입맞춤에 얼굴을 붉히는 꼴이 퍽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이리 발칙하고 겁 없는 여인은 난생처음 봅니다. 제 이름은 김생이라 합니다. 당파 싸움에 밀려 멸문지화를 당하다시피 한, 몰락한 남인 가문의 여식 없는 자식이지요."

김생. 이름마저 단출하고 기품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돌한 제안을 던졌다.

"좋다, 김생. 넌 오늘부터 이 별당에서 지내야겠다. 낮에는 내가 일러주는 다락이나 이불장 깊은 곳에 숨어 지내고, 밤에는 나와 함께 시문을 논하며 지내는 것이다. 네가 훔쳐 간 쌀 백 가마니의 대가를 다 치를 때까지, 넌 내 곁을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다."

"아기씨! 어찌 외간 남자를 규방에 숨겨두려 하십니까! 이는 발각되는 날엔 아기씨의 명예는 물론이거니와,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절 차라리 관아에 넘기시지요."

"내 입술을 훔친 것은 네놈이 아니더냐! 도둑질을 하러 왔으면 목숨을 걸었을 터, 이 정도 배짱도 없이 판서댁 담을 넘었단 말이냐. 아니면, 내가 두려운 것이냐?"

김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을 줄 알았더니, 이 오만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규방에 갇혀 밤마다 밀회를 즐기게 된 셈이다. 몰락한 양반의 긍지조차 이 여인의 당찬 기백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참으로 묘한 여인이로다. 벼랑 끝에 몰린 내 비루한 삶에 이토록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올가미가 던져질 줄이야.'

그날부터 두 사람의 기묘하고도 발칙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낮에는 쥐죽은 듯 다락방 구석이나 이중으로 덧대어진 벽장 속에 숨어 지내던 김생은, 밖의 소음이 잦아들고 밤의 장막이 내리면 어김없이 그녀의 방으로 내려왔다. 문밖에서는 하인들이 여전히 도둑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등잔잔불 아래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만의 세계는 평온하고도 짜릿했다.

그녀는 김생의 천재적인 글재주와 학식에 매일 밤 혀를 내둘렀다. 사서삼경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막힘이 없었고, 부패한 조정을 비판하는 세상을 향한 깊은 통찰력은 그녀의 아비인 판서조차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김생이 붓을 들어 써 내려가는 문장들은 하나같이 날이 서 있으면서도 백성을 향한 따뜻한 연민을 품고 있었다. 김생 역시 겉치레만 번지르르한 규수들과 달리, 사내 못지않은 학식과 담대한 기개로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그녀에게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이 시구는 참으로 통쾌하구나. 네가 만약 과거에 응시했다면 장원 급제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을 터인데. 어찌 이 아까운 재주를 썩히고 있었단 말이냐."

그녀가 아쉬운 듯 중얼거리며 김생이 쓴 화선지를 어루만지자, 김생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돈 없고 뒷배 없는 남인 출신이 어찌 벼슬길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뜻은 그저 몽상일 뿐, 노모의 끼니조차 챙기지 못해 남의 집 곳간을 터는 것이 제 분수이자 현실이지요. 저잣거리의 왈패보다 못한 놈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 네 재주를 썩히는 것은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내 어떻게든 널 세상 밖으로 꺼내어, 비루한 도둑놈이 아닌 정정당당한 사내로 만들어 줄 것이다. 당당히 벼슬길에 올라 네 뜻을 펼치게 할 것이야. 내 서방님으로 말이다."

'서방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붉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자, 김생이 쥐고 있던 찻잔이 잘게 떨렸다. 찻물이 일렁이며 그의 겉잡을 수 없는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김생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서안이 스르륵 밀려나고, 서로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밤마다 쌓아 올린 지적 교감은 어느새 깊고 짙은 연정으로 변해, 두 사람의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그녀가 무심결에 넘겨보는 책장 위로 김생의 크고 단단한 손이 겹쳐질 때마다, 혹은 차를 따르다 소매가 스칠 때마다 미세한 전류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서로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힐 때면 그 속에 담긴 노골적인 갈증을 숨길 수 없었다. 감옥이자 낙원인 이 좁은 방 안에서, 두 남녀는 서서히 서로에게 완전히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 5: 밤의 장막 아래 피어나는 정염

장대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깊은 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빗소리가 세상을 완전히 집어삼킨 듯 고요한 별당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요란한 빗소리 덕에 문밖의 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고, 방 안의 어떤 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갈 리 없었다. 며칠간의 은밀하고도 아슬아슬한 동거는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신분과 체면의 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렸고, 서로를 향한 육체적 갈증은 쏟아지는 빗방울처럼 짙어져만 갔다.

낮에 몸종을 시켜 몰래 들여놓은 탁주 몇 잔이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이 비 오는 밤의 눅눅하고 끈적한 공기가 이성을 마비시킨 탓이었을까. 술기운이 살짝 오른 그녀의 볼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김생은 홀린 듯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소의 단정하고 꼿꼿한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느슨해진 옷깃 사이로 하얀 목덜미와 쇄골이 요염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생, 넌 참으로 잔인하고 독한 사내다."

그녀가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아기씨께 무슨 몹쓸 짓이라도 하였습니까."

"몹쓸 짓을 하지 않아 문제인 것이다. 내 입술을 훔치고 내 방에 숨어 지내면서도, 어찌 이리 목석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냐. 밤마다 내 숨통을 조이는 이 갈증이 진정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내가 이리 너를 원하고 있거늘."

그녀의 도발적이고도 노골적인 속삭임에, 그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김생의 이성의 끈이 마침내 툭, 하고 끊어져 내렸다. 그는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 그녀의 얇은 허리를 억세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작은 체구가 김생의 단단하고 넓은 품 안에 빈틈없이 쏙 들어왔다.

"목석이라니요. 도둑놈의 억눌린 본성을 기어이 깨우신 건 아기씨입니다. 매일 밤 아기씨의 체향을 맡으며 제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이성을 다잡았는지 모르실 겁니다. 이제 와 두렵다며 후회하셔도, 늦었습니다."

낮고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뜨겁게 핥고 지나가자 그녀의 온몸이 잘게 떨렸다. 김생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이마를 지나 오뚝한 콧등, 그리고 애타게 기다려온 붉은 입술 위로 거침없이 내려앉았다. 이불장 안에서의 서투르고 다급했던 첫 입맞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깊고 농밀하며, 서로의 영혼마저 집어삼킬 듯 맹렬하고 끈적한 키스였다.

그녀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김생의 목에 단단히 감겼고, 김생의 투박하지만 뜨거운 손은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허리춤의 붉은 옷고름을 부드럽고도 능숙하게 끄르고 있었다. 사르륵, 비단 저고리와 치맛자락이 바닥으로 물 흐르듯 흘러내리는 소리가 요란한 빗소리에 묻혀 아득하게 들려왔다. 달빛조차 두꺼운 먹구름에 가려진 칠흑 같은 밤, 방 안을 밝히는 유일한 밀랍 촉대마저 김생의 거친 손짓 한 번에 흔들리다 꺼져버렸다.

'이 폭풍우 치는 밤이, 이 사내와의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으련만.'

완벽한 어둠 속에서 살갗이 맞닿는 마찰음과 달뜬 숨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굳은살이 박인 김생의 거칠고 뜨거운 손길이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을 헤집고 지나갈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는 짐승처럼 억눌린 교성이 달콤하게 흘러나왔다. 사대부 여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 신분과 체면 따위는 이 좁은 방 안에서 한낱 먼지보다 못한 것이었다. 오직 서로를 맹렬하게 탐하는 원초적인 본능과, 목숨을 내놓아도 좋을 만큼 깊어진 정염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김생… 조금 더…."

그녀의 얇은 손가락이 김생의 단단한 어깨 근육을 파고들며 생채기를 냈다. 두 남녀의 몸이 하나로 굳게 엮이는 순간,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아찔한 쾌감이 그녀의 전신을 벼락처럼 관통했다. 김생은 그녀가 낯선 아픔을 참아낼 수 있도록 다정하게 이마와 눈가에 입을 맞추며, 더욱 깊고 묵직하게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밤비처럼, 두 사람의 엉킨 몸짓은 멈출 줄 모르고 거칠고 집요하게 이어졌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목숨을 건 비밀스러운 사랑의 행위는 그 금기됨 덕분에 더욱 치명적이고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다. 밤이 깊어갈수록 방 안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고, 폭우 속의 작은 뗏목처럼 서로에게 의지한 채 두 사람은 욕망의 파도를 거듭 넘고 있었다.

※ 6: 판서의 사위가 되다

"아버님, 소녀 아침 일찍부터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폭풍우가 지나가고 눈부시게 맑게 갠 아침. 날이 밝자마자 그녀는 단호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아버지인 호조 판서의 사랑채를 찾았다. 지난밤의 뜨거웠던 열기와 격렬한 정사의 흔적이 아직 몸 곳곳에 붉은 자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판서는 며칠째 집안을 농락하고 달아난 도둑을 잡지 못해 심기가 극도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냐. 아침부터 이리 호들갑을 떨고. 내 머리가 도둑놈 때문에 깨질 지경이거늘."

"그 도둑놈 말입니다, 제가 잡았습니다."

판서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휘둥그레졌다. 들고 있던 곰방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뭐, 뭐라? 네가, 규방에 갇혀 지내는 네가 그 흉악무도한 도둑놈을 잡았단 말이냐! 당장, 당장 그놈을 밧줄로 꽁꽁 묶어 포박하여 내 앞에 대령하라! 내 그놈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고 뼈도 못 추리게 곤장을 쳐서 포도청에 넘길 것이다!"

"아버님, 고정하시옵소서. 그 자는 단순한 도둑이 아니옵니다. 비록 가난에 찌들어 늙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곳간을 털었으나, 그 학식과 인품, 세상을 보는 안목은 아버님 문하의 그 어떤 잘난 선비들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소녀, 그 자를 관아에 넘기는 대신 제 서방님으로 맞이하고자 합니다."

"이, 이게 무슨 해괴망측하고 천인공노할 소리냐! 뼈대 있는 사대부 양반가의 여식이, 그것도 호조 판서의 고명딸이 생면부지의 쌀도둑놈과 혼인을 하겠다니, 네가 정녕 귀신에 씌어 미친 것이냐!"

판서가 노발대발하며 서안 위의 벼루를 집어 던지려 할 때, 밖에서 헛기침 소리와 함께 단정한 도포 차림의 김생이 의연하게 걸어 들어왔다. 비록 옷은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역력하고 낡았으나, 그의 걸음걸이와 태도에는 한 치의 비굴함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김생은 씩씩대는 판서 앞에 정중히 큰절을 올린 뒤, 품에서 정성스럽게 쓴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두 손으로 바쳤다.

"소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감마님의 곳간을 턴 도적이 바로 저이옵니다. 허나 대감마님, 저를 포도청에 넘겨 목을 치시기 전에 부디 이 글을 한 번만, 딱 한 번만 읽어 보아 주시옵소서."

판서는 분노에 찬 붉은 얼굴로 두루마리를 낚아채듯 거칠게 펼쳐 보았다. 당장이라도 종이를 북북 찢어버릴 기세였으나, 글을 읽어 내려가는 판서의 얼굴이 점차 경악과 감탄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난 며칠간 조정에서, 그리고 호조에서 가장 골치를 앓고 있던 삼정의 문란과 조세 제도의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구체적이고도 완벽하게 제시한 방책이었다. 문장 하나하나에 호연지기가 담겨 있었고, 논리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벽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대신이라 자부하던 판서조차 무릎을 탁 칠 만큼 감탄을 금치 못할 명문장이었다.

"이… 이것을 진정, 남의 담장이나 넘던 네놈이 직접 적었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소인, 비록 당쟁에 밀려 초야에 묻힌 미천한 몸이오나, 대감마님께서 제게 길을 열어주신다면 이 목숨을 바쳐 무너져가는 나라와 백성, 그리고 대감마님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저 밖의 아기씨를 향한 제 연모의 마음 또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사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시옵소서."

판서는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깊고 긴 탄식을 내뱉었다. 도둑놈이라 욕하고 쳐죽이기엔 사내의 담력과 그릇이 너무 컸고, 관아에 넘겨버리기엔 그 천재적인 재주가 너무도 아까웠다. 무엇보다 옆에서 사내를 바라보는 제 딸의 눈빛이 이미 사내에게 온 마음을 다 내어준 듯,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결연했다. 이 고집 세고 똑똑한 딸년이 한 번 마음먹은 일을 제 아비라 한들 결코 꺾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판서였다.

"…내 너를 당장 하옥시켜 능지처참을 하는 것이 마땅하나, 이 비상한 글재주와 내 딸을 홀린 그 맹랑한 배짱이 아까워 참는 것이다. 딱 한 달. 한 달 뒤에 있을 알성시 과거에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 급제를 해온다면, 내 너를 사위로 인정하고 지난 도둑질은 모두 불문에 부치겠다. 허나 만에 하나 낙방한다면, 그날로 네놈의 목을 치고 내 딸은 비구니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김생의 흑요석 같은 눈빛이 매섭고도 찬란하게 빛났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반드시 장원 급제 교지를 들고 돌아오겠사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장안이 발칵 뒤집혔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몰락한 남인 출신의 선비가 쟁쟁한 권문세가의 자제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장원 급제를 차지한 것이다. 임금이 하사한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백마를 탄 채 화려하게 금의환향한 김생은, 곧바로 판서댁으로 향해 늠름하게 절을 올렸다.

담장을 넘던 비루한 도둑놈이, 조선 최고의 천재 관리로 인정받아 장안에서 가장 콧대 높은 판서댁의 듬직한 사위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공식적으로 양가의 축복 속에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처음 밀회를 즐겼던 그 비좁은 별당에서 합환주를 나누며 다시금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화려한 원삼을 벗겨내던 김생이 그녀의 귓가에 짓궂게 속삭였다.

"이제 평생 이 도둑놈의 곁에서 살아야 하는데, 도둑맞은 쌀이 아까워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김생의 농담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넓은 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내 쌀 고작 백 가마니에 조선 최고의 사내를 통째로 샀으니, 이보다 수지맞는 남는 장사가 조선 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 도둑놈아."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의 맑은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갈랐고, 달빛이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듯 기와지붕 위로 눈부시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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