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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루한 도포와 숨겨진 진심

조선 로맨스 2026. 10. 19. 22:46

목차



    남루한 도포와 숨겨진 진심

    태그:

    #선비와기생, #과거급제, #장원급제, #감동로맨스, #역전의드라마, #옛날이야기, #시니어오디오북, #유쾌한전설, #인생역전, #오디오드라마, #전설의고향, #해학이야기, #교과서밖역사, #재밌는옛날이야기, #조선시대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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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트로:

    옛날 한양에 무려 십 년 동안이나 과거 시험에서 미끄러진 지독한 낙방거사 선비 '박진'이 살았습니다. 가산을 다 탕진하고 끼니조차 잇기 힘들던 이 못난 선비를, 일패 기생 '매향'이 자신의 비녀와 패물까지 팔아가며 십 년 세월 묵묵히 뒷바라지해 주었지요. 마침내 네 번째 치른 식년시에서 꿈에 그리던 장원급제를 거머쥔 박진! 하지만 그는 금의환향하는 대신, 매향의 마음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다 찢어진 도포에 진흙투성이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 또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박진을 내쫓으려는 기방 행수의 구박 속에서 매향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눈물 나게 감동적이고 속이 뻥 뚫리는 통쾌한 로맨스, 지금 시작합니다.

    ※ 1: 십 년 묵은 낙방거사와 옥비녀를 판 기생의 눈물겨운 뒷바라지

    조선 후기, 전라도 남원 땅에서도 풍류가 넘치기로 이름난 일류 기방 '모란각'에는, 소리면 소리, 춤이면 춤, 거기에 매화꽃처럼 고운 자태까지 겸비하여 고을 한량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는 일패 기생 '매향'이 살고 있었습니다. 돈 많은 부잣집 영감들과 세도가 자제들이 매향의 치맛자락 한 번 잡아보려고 비단과 은자를 바리바리 싸 들고 줄을 섰건만, 어쩐 일인지 매향은 그 모든 유혹을 찬 바람처럼 물리치고 오직 한 사내만을 십 년째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복 터진 사내가 누구인가 하니, 남원 고을 외진 산기슭의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사는 스물아홉 살 가난뱅이 선비 '박진'이었습니다.

    사실 남들이 보기에는 박진이 그저 책만 파는 창백하고 비실비실한 샌님 선비로 보였으나, 매향이 그를 죽고 못 살게 연모하며 십 년 세월을 매달린 데에는 남들에게 말 못 할 두 사람만의 은밀하고도 뜨거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십 년 전 봄날 밤, 우연히 위기에 처한 매향을 구해주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을 때부터, 두 사람은 그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천생연분이라 할 만큼 남녀 간의 속정이 불꽃처럼 뜨겁고도 깊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성현의 말씀을 읽는 점잖은 선비였지만, 밤이 되어 매향의 방에 들어설 때면 박진은 그 어떤 무관 장수 부럽지 않은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다정함으로 매향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녹여주곤 했습니다. 한 이불 속에서 살을 맞대고 사랑을 나눌 때마다 어찌나 손발이 척척 맞고 속궁합이 기가 막혔던지, 매향은 비록 낮에는 기방에서 고단한 삶을 살지언정 박진의 품에 안기는 밤이면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고 극락을 맛보곤 했지요.

    하지만 방 안에서의 금슬과 달리, 세상 밖에서의 운수는 지지리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박진은 글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과거 시험장만 가면 지독한 불운이 따라붙었습니다. 스무 살에 본 첫 과거에서는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낙방을 하더니만, 그 뒤로 삼 년마다 열리는 식년시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아깝게 미끄러져 무려 십 년 세월을 '만년 낙방거사'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십 년 동안 한양을 오가며 과거 뒷바라지를 하느라 박진의 선산과 논밭은 진작에 남의 손에 넘어갔고, 이제는 당장 저녁에 끓여 먹을 보리쌀 한 줌조차 없는 알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 오륙 년 동안 박진의 끼니와 책값, 심지어 기운을 차리게 해 줄 밤참과 보약 값까지 전부 기생 매향이 가야금을 타서 번 돈으로 대주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 모란각 후원 정자 밑에서는 기방의 주인인 욕심쟁이 행수 어멈 '백 노파'가 매향을 앉혀 놓고 삿대질을 해대며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이 속 터지고 미련곰탱이 같은 년아! 네 나이가 올해로 스물다섯이다, 스물다섯! 다른 기생들은 돈 많은 부잣집 영감님들 첩으로 들어가서 호의호식하든가, 기방에서 금비녀 은비녀를 쓸어 담고 있거늘, 너는 대체 그 비실비실한 박진 선비 놈의 어디가 그리도 좋아서 십 년째 제 살을 깎아 바치며 청춘을 다 보낼 작정이냐!"

    백 행수의 앙칼진 고함 소리에 옆을 지나가던 동료 기생 홍련과 춘섬이도 부채로 입을 가리며 얄밉게 키득거렸습니다.

    "호호, 행수 어머님도 참! 우리 매향 언니가 왜 저러는지 아직도 모르세요? 겉으로는 박 샌님이 학식이 높아서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밤마다 둘이 이불 속에서 죽고 못 사는 모양이지요! 아니,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는 가난뱅이 샌님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서 우리 도도한 매향 언니 혼을 쏙 빼놓았는지 몰라요!"

    "맞아요, 맞아! 아무리 밤에 정이 깊어도 그렇지, 십 년 동안 미역국만 네 사발째 들이켠 양반이 무슨 수로 급제를 한답니까요? 그냥 평생 기생 치마폭에 싸여서 고혈이나 빨아먹고 살 팔자지요!"

    기생들의 노골적이고 얄미운 비아냥거림에 매향의 하얀 뺨이 살짝 붉어졌으나,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기죽지 않고 차분하고도 단아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행수 어머님, 그리고 홍련아. 남녀가 서로 뜻을 맞추고 몸과 마음을 나누는 부부의 정을 어찌 돈 몇 푼에 비할 수 있겠느냐. 박 선비님께서는 비록 지금은 운 때가 닿지 않아 날개를 펴지 못하고 계시나, 밤마다 저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여인으로 품어주시는 든든한 지아비이자 학식 깊은 선비님이십니다. 이번 가을 한양에서 열리는 식년시에서는 반드시 큰 뜻을 이루실 것이옵니다."

    "에잉, 지랄하고 자빠졌네! 밤마다 이불 속에서 정분이 났든 어쨌든, 내 기방에서 돈 안 되는 식충이 놈은 더 이상 못 봐준다! 오늘부터 내 눈에 그 박진 놈 그림자만 얼씬거려도 부엌의 소금 가마니를 통째로 뒤집어씌워 내쫓을 것이니, 또 그놈한테 노잣돈 보태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백 행수가 침을 퉤 뱉고 돌아서자, 매향은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리고는 장롱 깊숙한 곳에서 고운 비단 보자기 하나를 꺼내었습니다. 그 안에는 매향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겨주신, 매향이 목숨처럼 아끼던 '비취 옥비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삼경, 모두가 잠든 시각에 모란각 뒷담장 개구멍을 통해 박진이 숨을 죽이며 매향의 방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나야 하는 마지막 밤이었기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뜨겁게 부둥켜안았습니다.

    비록 앞날은 막막하고 가진 것은 없었으나, 등불을 끈 어둠 속에서 서로의 살결을 어루만지며 나누는 두 사람의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애절하고도 뜨거웠습니다. 한바탕 폭풍우 같은 정사가 지나가고, 매향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박진의 넓은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땀에 젖은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아주었습니다.

    "선비님... 오늘 밤 선비님의 품이 유난히 더 따뜻하고 든든하옵니다. 이 고운 기운을 그대로 몰아 한양에 올라가시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용문에 오르실 것이옵니다."

    매향은 조용히 일어나, 낮에 비취 옥비녀를 전당포에 맡겨 바꾼 엽전 서른 냥과 손수 지은 새 명주 도포 한 벌, 그리고 박진의 기력을 보충해 줄 산삼 달인 약병을 보자기에 싸서 박진의 손에 안겨 주었습니다.

    박진은 보자기 속에 든 묵직한 엽전 꾸러미와, 매향의 칠흑 같은 머리에서 늘 빛나던 그 비취 옥비녀가 사라지고 볼품없는 나무 비녀가 꽂혀 있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미어져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매향아... 이 무능한 사내가 십 년 동안 밤마다 너의 고운 몸만 탐하고 호강 한 번 시켜주지 못했거늘, 이제는 네 어머님 유품인 옥비녀까지 팔아 내 노잣돈을 대게 만들다니... 내가 사내 대장부의 탈을 쓰고 어찌 네 앞에 고개를 들 수 있겠느냐..."

    박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매향의 어깨 위로 뚝 떨어지자, 매향은 고운 손으로 박진의 뺨을 감싸 쥐며 봄꽃처럼 환하고 요염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선비님, 약한 말씀 마시옵소서. 제 머리의 찬란한 옥비녀보다, 밤마다 저를 여인으로 피어나게 해 주시는 선비님의 이 뜨거운 가슴과 높은 뜻이 저에게는 백배 천배 더 소중하옵니다. 한양 가시는 길에 이 보약을 드시며 기운 차리시고, 행여 이번 과거에 또 뜻대로 되지 않으시더라도 절대 낙심 말고 몸만 성히 제 품으로 돌아오시옵소서. 저는 선비님이 평생 짚신을 삼는 필부로 사신다 해도, 밤마다 선비님의 이불 속을 데우며 끝까지 곁을 지킬 것이옵니다."

    매향의 그 뼈를 녹이는 듯한 사랑과 변함없는 순정에, 박진은 매향의 붉은 입술에 깊이 입을 맞추며 속으로 피 맺힌 맹세를 다졌습니다.

    '내 이번 과거에서 기어이 장원급제를 하여 이 천하절색의 여인을 정경부인 가마에 태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한강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결코 빈손으로 이 남원 땅을 다시 밟지 않으리라!'

    ※ 2: 성균관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장원급제, 그리고 선비의 엉뚱한 장난

    매향의 피눈물 나는 정성과 눈물이 마침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요. 그로부터 한 달 뒤, 한양 대궐의 춘당대에서 열린 식년시 대과 시험장에서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십 년 동안 뼈를 깎는 각오로 갈고닦았던 박진의 학식이 그날따라 물 만난 고기처럼 폭발하여, 백성들의 굶주림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를 엄단해야 한다는 그의 대책문(답안지)이 임금님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버린 것입니다!

    "과인이 왕위에 오른 이래 이토록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과 경륜이 담긴 명문장은 처음 보았도다! 남원 유생 박진을 이번 식년시 갑과 제1인, 즉 '장원(壯元)'으로 삼고 즉시 사헌부 감찰에 제수하노라!"

    임금님의 우렁찬 어명이 떨어지고, 성균관과 한양 거리에는 박진의 이름이 적힌 방이 나붙었습니다. 어사화를 꽂은 관모를 쓰고 푸른 관복을 입은 박진은, 임금님이 친히 내려주신 붉은 급제 증서인 '홍패(紅牌)'를 가슴에 품고 한양 거리를 행진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십 년 세월의 설움과 가난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일주일 뒤, 박진은 임금님으로부터 고향에 내려가 잔치를 벌이고 오라는 휴가와 함께, 지방 관아에서 내어주는 풍악대와 역마, 그리고 푸짐한 하사품을 거느리고 의기양양하게 남원 땅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남원 고을 어귀인 오리정 고개에 당도했을 때였습니다. 말 위에 높이 앉아 모란각이 있는 읍내 쪽을 내려다보던 박진은, 지금쯤 자기가 급제했는지 떨어졌는지 소식을 몰라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고 있을 매향의 고운 얼굴이 떠올라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원래 성품에 은근히 해학과 장난기가 다분했던 박진의 머릿속에 아주 짓궂고도 낭만적인 생각이 하나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허허, 잠깐만! 내가 지금 이 화려한 관복 차림으로 피리 불고 북 치며 모란각 대문으로 들이닥치면, 매향이는 물론이고 그동안 나를 거지 취급하며 소금 뿌리던 백 행수 노파와 기생 년들까지 전부 내 앞에 납작 엎드려 아양을 떨 것이 아니냐! 그렇게 싱겁게 끝내면 재미가 없지! 내가 십 년 만에 성공했는데, 그동안 내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던 인간들의 진짜 속내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구경하고, 무엇보다 우리 매향이를 세상에서 제일 깜짝 놀라게 해 줄 기막힌 연극을 한 번 벌여보아야겠다!'

    박진은 뒤따라오던 방자와 역졸들, 그리고 악공들을 오리정 숲속에 잠시 멈추어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번쩍이는 비단 관복과 어사화 꽂힌 사모를 벗어 보자기에 꽁꽁 싸고, 그 안에 붉은 장원급제 홍패를 깊숙이 숨겼습니다.

    "나리! 아, 아니 이 좋은 관복을 벗으시고 왜 옛날에 입으시던 그 구멍 난 헌 도포를 도로 꺼내 입으시는 것이옵니까?"

    방자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묻자, 박진은 껄껄 웃으며 길가의 진흙과 마른 풀잎을 한 움큼 집어 들어 자기 얼굴과 도포 자락에 문질러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머리 상투까지 반쯤 풀어 헤쳐 영락없이 산도적을 만나 얻어맞고 굴러떨어진 거지 중의 상거지 꼴로 완벽하게 변장을 마쳤습니다!

    "이놈아, 가만히 있어 보아라! 내 먼저 이 거지꼴로 모란각에 들어가서 이번에 또 낙방했다고 울상을 지어 보일 터이니, 너희들은 모란각 담장 밖 골목길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거라! 그러다가 내가 마당에서 박수를 딱 세 번 치거든, 그때 문을 박차고 들어와 북을 울리고 피리를 불며 내 관복을 가져오란 말이다! 알아들었느냐?"

    "헤헤헤, 우리 나리 장난기 발동하시는 건 장원급제를 하셔도 여전하시구먼요!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박진은, 화려한 장원급제 홍패 보따리를 가슴속 깊이 품어 숨긴 채, 다 찢어진 짚신을 질질 끌고 지팡이 대신 부러진 나뭇가지를 짚으며 모란각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 3: 진흙투성이 도포 자락으로 기방에 나타난 선비의 능청스러운 거짓말

    그 시각, 모란각 기방 마당에서는 오늘이 한양 과거 시험 방이 붙고 선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이라는 소식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매향은 아침 일찍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가장 고운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채, 대문간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한양 쪽에서 내려오는 길목만 목이 빠져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늘쯤이면 우리 선비님께서 분명 남원 땅에 당도하실 텐데... 제발, 이번만큼은 하늘이 우리 선비님의 피땀 어린 노력을 외면하지 않으셨기를... 아니야, 설령 이번에도 뜻대로 되지 않으셨다 한들 어떠랴. 삼십 리 먼 길을 걸어오시느라 다리나 붓지 않으셨을지, 배나 곯지 않으셨을지 그것이 더 걱정이구나.'

    매향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대청마루에서 곰방대를 빡빡 빨고 있던 백 행수 노파가 그 꼴을 보더니 또 심술보가 터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매향 년아! 대문간에 서서 목을 빼고 있으면 그 박진 놈이 말 타고 어사화 꽂고 올 줄 아느냐? 아까 아침에 이방 나리가 다녀가면서 그러는데, 올해 남원 고을에서 급제한 사람이 딱 한 명 나왔다더구나! 근데 보나 마나 그건 이 고을 좌수 영감네 조카 도령일 것이고, 네 서방인지 웬수인지 하는 그 박진 놈은 이번에도 미역국 한 동이를 퍼마시고 어디 술집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옆에서 얼굴에 분을 바르던 기생 홍련과 춘섬이도 덩달아 까르르 웃으며 거들었습니다.

    "아이구, 행수 어머님! 박 샌님이 무슨 돈이 있어서 술집에 가겠어요? 매향 언니가 옥비녀 팔아 준 서른 냥도 벌써 다 까먹고, 지금쯤 한양 거지 움막에서 바가지 들고 밥 빌어먹고 있겠지요! 만약 오늘 그 박 샌님이 또 떨어져서 이 대문으로 기어들어 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니까요!"

    기생들의 얄미운 비웃음 소리에 매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반쯤 열려 있던 모란각의 대문이 삐거덕, 하는 처량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부러진 나뭇가지를 짚은 웬 흙투성이 거지 사내 하나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마당 안으로 비틀비틀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머리는 산발이 되어 지푸라기가 엉겨 붙어 있었고, 한 달 전 매향이 정성껏 지어 입혀 보냈던 그 하얀 명주 도포는 어디서 개한테 물렸는지 갈기갈기 찢어져 시커먼 진흙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어머나, 저, 저게 누구야? 웬 거지가 대낮에 기방 마당으로 들어온대?"

    기생들이 코를 막으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대문간에 서 있던 매향이 그 거지 사내의 얼굴을 알아보더니 그만 숨이 턱 막혀 가슴을 부여잡았습니다.

    "서, 선비님...?! 박 선비님이시옵니까?!"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고개를 든 사내는, 다름 아닌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났던 박진이었습니다! 박진은 매향의 얼굴을 보자마자, 지팡이를 내던지고 마당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기방이 떠나가라 대성통곡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아이고오... 매향아! 내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내가... 이 천하에 무능하고 팔자 사나운 박진이 글쎄 이번 과거에서도 또... 또 낙방을 하고 말았구나! 아이고, 내 팔자야!"

    박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땅바닥을 치고 울자(사실은 손바닥 뒤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마루에 앉아 있던 백 행수와 기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입을 떡 벌렸습니다.

    박진은 흙 묻은 소매로 눈물을 닦는 척하며 더욱 구슬프고 처량한 목소리로 넋두리를 이어갔습니다.

    "내가 시험장에서 붓을 들었더니만, 갑자기 배탈이 나서 뒷간을 열 번이나 들락날락하느라 글씨를 한 줄도 제대로 못 쓰고 쫓겨났지 뭐냐! 게다가 내려오는 길에 충청도 산골에서 산도적 떼를 만나 네가 옥비녀 팔아 준 돈 서른 냥도 다 털리고, 옷도 다 뺏길 뻔하다가 겨우 목숨만 건져서 사흘을 굶으며 걸어왔단다! 아이고, 매향아... 나 배고파 죽겠다, 찬밥 덩어리라도 있으면 한 술만 다오, 흑흑..."

    박진의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고 완벽한 거지 낙방거사 연기에, 매향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에 할 말을 잃었고, 대청마루의 백 행수 노파는 이마의 핏대가 시퍼렇게 솟구쳐 오르며 고무신을 벗어 들고 마당으로 뛰어 내려왔습니다.

    ※ 4: 소금 바가지를 든 기방 행수의 행패와 기생들의 비웃음

    "아이고오, 내 저럴 줄 알았다! 내 저 인간이 또 미역국을 한 가마니째 들이켜고 거지꼴로 기어들어 올 줄 내 손금 보듯 알았어!"

    대청마루에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뛰어 내려온 백 행수 노파는, 마당에 주저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박진을 보자마자 눈에서 불을 뿜으며 부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굵은소금이 수북하게 담긴 큰 바가지와 낡은 대빗자루를 양손에 들고 나와, 박진의 머리 위로 소금을 한 주먹씩 팍팍 뿌려대기 시작했습니다!

    "에잉, 재수 없어! 퉤, 퉤! 대낮부터 어디서 이런 상거지 역병신 같은 놈이 남의 귀한 기방 마당에 기어들어 와서 재수 없게 곡소리를 내는 거여! 야, 이 염치도 없고 낯짝도 두꺼운 박진 놈아! 네놈이 사람이냐, 남의 피 빨아먹는 거머리냐!"

    백 행수가 소금을 뿌리며 대빗자루로 박진의 등짝을 후려치려 하자, 옆에서 구경하던 기생 홍련과 춘섬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깔깔거리고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푸하하하! 내 말 맞지요, 행수 어머님? 내가 아까 뭐랬어요! 박 샌님이 급제를 하기는커녕 산도적한테 옷까지 다 뺏기고 거지꼴로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요!"

    "어쩜 좋아! 세상에, 시험장에서 배탈이 나서 뒷간만 열 번을 들락거렸대요! 선비가 아니라 아주 똥장군이시네, 똥장군! 저런 무능한 사내를 십 년 동안이나 영의정 될 사람이라고 떠받들며 옥비녀까지 팔아 바친 우리 매향 언니만 천하의 바보 천치가 되었구먼요!"

    기방 하인들까지 몰려나와 손가락질을 해대며 키득거렸습니다. 바닥에 엎드려 소금 세례를 맞고 있는 박진은, 따가운 소금 알갱이가 목덜미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습니다.

    '허허, 참으로 세상 인심 한 번 고약하구나! 내가 어사화 꽂고 들어왔으면 내 발바닥이라도 핥았을 인간들이, 또 떨어졌다고 하니 당장 개 패듯 패서 내쫓으려 드는구나! 어디, 이번에는 우리 매향이가 어찌 나오는지 한번 볼까.'

    그때, 백 행수 노파가 아예 박진의 멱살이 아니라 매향의 머리채를 잡을 기세로 달려들며 악을 썼습니다.

    "야, 이 매향 년아! 네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이 거머리 같은 박진 놈은 평생 가도 과거 급제는커녕 제 입에 풀칠도 못 할 천하의 식충이란 말이다! 네가 지난 십 년 동안 이놈 뒷바라지하느라 날린 돈이 기와집 세 채 값이다! 오늘 당장 내 눈앞에서 저 거지 같은 놈의 뺨을 치고 인연을 끊겠다고 맹세해라! 만일 오늘도 저놈을 감싸고돌면, 당장 저놈을 멍석말이해서 개울가에 내던지고 너는 저 읍내 칠십 먹은 최 부자 영감한테 첩으로 팔아넘길 줄 알아라!"

    백 행수가 대빗자루를 높이 치켜들고 박진의 머리를 내리치려 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행수 어머님! 안 됩니다! 차라리 저를 때리시옵소서!"

    창백하게 질려 서 있던 매향이 눈빛을 바꾸더니, 쏜살같이 달려와 진흙투성이가 된 박진의 몸 위를 자신의 고운 연분홍 비단 치마폭으로 감싸 안으며 온몸으로 대빗자루를 가로막았습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친 대빗자루 끝이 매향의 가냘픈 어깨를 때렸지만, 매향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박진을 품에 꼭 안은 채 빗자루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습니다.

    "이, 이 미친년 보게! 네가 기어이 이 거지 놈하고 같이 죽기로 작정을 했구나! 비키지 못해, 이년아!"

    "못 비키옵니다, 어머님! 선비님께서 삼십 리 길을 굶으며 걸어오시어 기진맥진하셨는데, 어찌 사람으로서 매질을 하여 내쫓을 수 있단 말이옵니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비단옷이 진흙으로 더렵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를 대신 맞는 매향의 등 뒤에서, 거지 연기를 하던 박진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코끝이 시큰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습니다.

    ※ 5: 비상금 보따리를 내던진 매향의 순정과 선비가 흘린 뜨거운 눈물

    백 행수 노파는 매향이 끝까지 박진을 감싸고돌자, 아예 빗자루를 내던지고 마당 바닥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쭉 뻗으며 돈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냐, 좋다! 네년이 저 거지 놈하고 정히 못 헤어지겠다면, 그동안 네가 저놈 뒷바라지하느라 우리 모란각에 진 빚 오십 냥하고, 오늘 저놈이 우리 기방 마당에 들어와 재수 없게 만든 손해배상금 오십 냥까지 합쳐서 당장 은자 백 냥을 내놓아라!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백 냥을 안 내놓으면, 포졸들을 불러 저 박진 놈을 무전취식과 기방 난동죄로 감옥에 처넣어 곤장을 맞혀 죽일 테니 그리 알아라!"

    "어머님! 백 냥이라니요, 제가 지금 그런 큰돈이 어디 있다고 그러시옵니까..."

    "돈 없으면 당장 저놈을 발길로 차서 내쫓든가!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 이년아!"

    백 행수의 악랄한 협박과 동료 기생들의 비웃음 속에서, 기방 안의 모든 시선이 매향에게로 쏠렸습니다. 아무리 정이 깊다 한들 십 년 동안 네 번이나 과거에 떨어져 산거지가 되어 돌아온 사내를 위해, 누가 백 냥이라는 거금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들 이제 매향도 지쳐서 박진을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매향은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방에서 나온 매향의 두 손에는 낡았지만 정성스럽게 꿰맨 '무명 보자기'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매향은 백 행수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는, 그 무명 보자기를 바닥에 내려놓아 풀었습니다. 보자기 안에는 매향이 열다섯 살에 기방에 들어온 날부터 지난 십 년 동안, 손끝이 닳도록 바느질을 하고 손님들이 던져준 푼돈을 한 닢 두 닢 피눈물 나게 아껴 모아둔 엽전 꾸러미와 은비녀, 가락지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아는 기생 홍련이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어머나, 매향 언니! 그 돈은 언니가 기생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려고 십 년 동안 밥 굶어가며 모은 '속량(贖良) 몸값' 비상금 아니에요?! 그 피 같은 돈을 저 거지 선비 구하겠다고 다 내놓는단 말이에요?!"

    홍련의 외침에도 매향은 흔들림 없이 백 행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행수 어머님, 여기 제가 지난 십 년 동안 제 몸을 속량하려고 모아둔 돈 여든 냥과 패물 스무 냥어치, 도합 백 냥이 다 들어 있사옵니다. 이 돈을 전부 어머님께 드릴 터이니, 제발 우리 박 선비님을 모욕하지 마시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여 쉬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저는 평생 기생 면천을 못 하고 이 기방에서 늙어 죽어도 좋사옵니다!"

    "세, 세상에... 저 바보 천치 같은 년이 진짜로 자기 면천할 몸값을 다 털어 내놓네!"

    백 행수는 눈이 뒤집혀 침을 흘리며 그 돈 보따리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돈을 다 내어준 매향은 다시 진흙 바닥에 앉아 있는 박진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원망하는 기색 없이, 자신의 하얀 명주 수건으로 박진의 얼굴에 묻은 시커먼 진흙과 소금기를 정성스럽게 닦아주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선비님... 먼 길 걸어오시느라 얼마나 고단하고 시장하셨사옵니까. 선비님, 이번 과거에 낙방하셨다고 하여 행여나 마음 상하시거나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사람의 운 때란 하늘이 정하시는 것이니, 어찌 선비님의 학식이 부족한 탓이겠습니까."

    매향은 박진의 흙 묻은 두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포근하게 감싸 쥐며 환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선비님, 괜찮사옵니다. 비록 제 비상금은 다 털렸으나, 제게는 아직 가야금을 탈 수 있는 두 손이 있고 밤마다 베를 짤 수 있는 건강한 몸이 있사옵니다. 제가 오늘부터 잠을 더 줄여서 베를 짜고 손님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삼 년 뒤 다음 과거 시험 노잣돈은 얼마든지 또 모을 수 있사옵니다! 백 번 떨어지시면 백 번을 뒷바라지해 드릴 터이니, 기죽지 마시고 어서 제 방으로 가셔서 따뜻한 밥부터 잡수시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장난으로 거지 연기를 하고 있던 박진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습니다.

    자신을 시험하려 했던 얄팍한 장난기가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지난 십 년 세월 이 가냘픈 여인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과 수모를 홀로 삼켜왔는지가 뼈저리게 느껴져, 박진의 두 눈에서 연기가 아닌 진짜 뜨거운 참회와 감격의 눈물이 봇물 터지듯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매향아... 아아, 내 어리석고도 고마운 사람아! 내가... 내가 정말로 죽을죄를 지었구나!"

    박진은 매향을 와락 끌어안고 어깨를 들썩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생들은 박진이 미안해서 우는 줄 알고 또 혀를 끌끌 찼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모란각의 역사를 통째로 뒤집어 놓을 대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 6: 도포 속에서 나온 붉은 홍패와 어사화, 기방을 뒤흔든 통쾌한 대역전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훔쳐낸 박진이,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구부정했던 허리를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방금 전까지 배고프다고 징징거리던 불쌍한 낙방거사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매처럼 날카롭고 위엄 넘치는 사헌부 감찰 어른의 서릿발 같은 안광이 기방 마당을 압도했습니다.

    박진은 매향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돈 보따리를 끌어안고 히죽거리고 있는 백 행수 노파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여봐라, 백 노파! 그 더러운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내 아내 매향이의 피땀 어린 돈 보따리를 당장 그 자리에 내려놓지 못할까!"

    갑자기 호랑이 같은 목소리로 돌변한 박진의 태도에 백 행수와 기생들이 흠칫 놀라 눈을 껌뻑거렸습니다.

    "아, 아니 이 거지 선비 놈이 갑자기 미쳤나! 매향이가 지 발로 내놓은 돈을 왜 내려놓으라 마라야! 그리고 누가 네놈 아내란 말이냐!"

    백 행수가 코웃음을 치자, 박진은 입가에 호탕하고도 짓궂은 미소를 씨익 지으며 자신이 입고 있던 다 찢어진 헌 도포의 앞자락을 좌악, 하고 뜯어내듯 열어젖혔습니다!

    그리고는 도포 안쪽 깊숙한 품속에서, 금실로 봉황이 수놓아진 비단 보자기를 꺼내어 마당 한가운데에서 활짝 펼쳐 보였습니다. 보자기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임금님의 어보(옥새)가 시뻘겋게 찍혀 찬란한 빛을 내뿜는 '장원급제 홍패(紅牌)'와 정육품 '사헌부 감찰의 백옥 호패'였습니다!

    "어, 어라?! 저, 저 붉은 종이는...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한테만 임금님이 내려주신다는 홍패가 아니여?!"

    기방 마당에 모인 사람들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습니다.

    박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손뼉을 '짝! 짝! 짝!' 하고 힘차게 세 번 쳤습니다!

    박수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굳게 닫혀 있던 모란각의 대문이 우당탕탕 부서질 듯 열리더니, 밖에서 숨어 대기하고 있던 관아의 육방 관속들과 악공 스무 명이 "사헌부 감찰 박진 나리 행차요! 어사화 받들라!" 하고 고함을 치며 마당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찡얼찡얼 울려 퍼지는 태평소 소리와 쿵쾅거리는 북소리 속에서, 방자와 역졸들이 달려와 박진의 찢어진 거지 도포를 벗겨내고, 그 위에 눈이 부시도록 푸른 비단 관복과 금관자 달린 사모, 그리고 화려한 어사화를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입혀 올렸습니다!

    단 일각 만에 진흙투성이 상거지에서 어사화를 꽂은 위풍당당한 정육품 사헌부 감찰로 변신한 박진의 모습에, 백 행수 노파와 기생 홍련, 춘섬이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마당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세, 세상에나! 아까 이방 나리가 남원에서 장원급제한 사람이 딱 한 명 나왔다더니만, 그 장원급제한 분이 좌수 댁 조카가 아니라 바로 박진 선비님이셨단 말이여?! 아이고, 나 죽었네!"

    사색이 된 백 행수가 돈 보따리를 내던지고 이마가 깨지도록 바닥에 찧으며 살려달라고 빌기 시작했습니다. 어사화를 꽂은 박진은 매향의 앞에 서서, 조금 전 매향이 내놓았던 비상금 보따리를 집어 들어 매향의 품에 도로 안겨 주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도 낭만적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매향아, 이 짓궂은 낭군을 용서하거라. 내가 십 년 만에 장원급제를 하여 내려오는 길에, 그간 너를 구박하던 저자들의 콧대도 꺾어주고 무엇보다 나를 향한 너의 그 깊고 푸른 진심을 내 두 눈에 영원히 새겨두고 싶어 잠시 못된 거지 노릇을 하였단다. 자, 네가 십 년 동안 피눈물로 모은 이 비상금은 고이 거두어라! 오늘 이 시각부터는 네 돈이 아니라, 이 나라 임금님께서 내게 내려주시는 조정의 녹봉(국록)으로 내 평생 너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정경부인으로 호강시켜 줄 것이니라!"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광경에 입을 틀어막고 있던 매향은, 어사화를 꽂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연인의 늠름한 모습을 올려다보며 마침내 참았던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으며 박진의 가슴에 와락 안겼습니다.

    "선비님... 아아, 나리! 너무하시옵니다, 정말로 너무하시옵니다! 저는 선비님께서 정말로 또 낙방하시고 산도적에게 맞으신 줄 알고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는데... 흐흑, 장원급제라니요, 정말로 장원급제를 하셨단 말씀이옵니까!"

    "하하하! 그래, 매향아! 네가 옥비녀까지 팔아 내게 쥐여준 그 뜨거운 눈물 덕분에 내가 기어이 팔도 선비들을 다 제치고 장원을 하였단다!"

    박진은 품속에서 또 하나의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어 매향의 머리에 직접 꽂아주었습니다. 그것은 한양 내려오는 길에 전당포에 들러 되찾아온 매향의 어머님 유품, 바로 그 '비취 옥비녀'였습니다!

    이어 박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백 행수 노파와 기생들을 서늘하게 내려다보았습니다.

    "여봐라, 백 노파! 국법에 의하면 사헌부 감찰의 정실부인이 될 사람을 천민 취급하며 매질하고 돈을 갈취하려 한 죄는 곤장 백 대에 기방 폐쇄형에 처함이 마땅하다! 허나 오늘 내 경사스러운 날에 피를 보기는 싫으니, 지금 당장 매향이의 기적(기생 명부)을 불태워 양인으로 면천시키고, 네년이 그동안 매향이에게서 뜯어낸 돈의 절반을 내놓아 저 불쌍한 기생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만일 내 말을 어기면 사헌부의 철퇴가 네년 머리 위로 떨어질 줄 알아라!"

    "예, 예! 감찰 나리! 당장 기적을 불태우고 분부대로 다 거행하겠사옵니다! 마님, 매향 마님,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방금 전까지 매향을 종년 부리듯 하던 백 행수와 기생들이 일제히 매향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마님, 축하드리옵니다!" 하고 비는 모습에, 마당에 모인 구경꾼들은 모두 속이 뻥 뚫린다며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박진은 문밖에 대기시켜 두었던 화려한 사인교(네 명이 메는 귀부인의 가마)를 마당 한가운데로 불러들인 뒤, 매향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 가마에 태웠습니다.

    남루한 도포 속에 장원급제의 홍패를 숨겨 와 연인의 변치 않는 순정을 확인했던 유쾌한 선비 박진과,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지아비를 끝까지 믿고 지켰던 일편단심 기생 매향은, 그렇게 풍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봄날의 꽃길을 따라 나란히 웃으며 새로운 인생을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갔다고 전해집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남루한 도포와 숨겨진 진심', 박진 선비와 기생 매향의 통쾌한 역전 로맨스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장원급제를 하고도 일부러 거지꼴로 나타나 연인의 진심을 확인한 선비의 짓궂은 장난도 유쾌하지만, 사내가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도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털어 감싸 안은 매향의 깊은 사랑이 코끝을 찡하게 만듭니다. 가난할 때 내 손을 잡아준 사람을 성공했을 때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준 선비의 의리가 참으로 멋지지요. 오늘 이야기로 기분 좋게 웃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따뜻한 댓글 부탁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도 더욱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