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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장수와 규수의 위험한 거래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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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매일같이 외상으로 짚신을 내어주던 가난한 사내. 툭하면 몸으로 갚으라는 상스러운 농을 던졌지만, 그건 닿을 수 없는 양반댁 아기씨를 향한 서툰 순정이었다. 빚이 산더미처럼 쌓인 어느 밤, 밤봇짐을 싼 규수가 사내의 좁은 문간을 넘어섰다. "밀린 빚을, 치르러 왔네." 과연 이 발칙한 거래의 끝은 어디일까?
※ 1: 짚신 장수의 엉뚱한 수작과 몰락한 규수
장터의 흙먼지가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한낮. 비릿한 생선 냄새와 쉰내 나는 탁주 냄새가 뒤엉킨 왁자지껄한 난전 한구석에, 거적때기 하나를 깐 채 웅크리고 앉아 쉴 새 없이 짚을 꼬는 사내가 있었다. 손마디는 굵고 투박했으며, 여기저기 베이고 찔린 흉터 위로 굳은살이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양반들의 가마가 지나갈 때면 굽신거리며 길을 내어주고, 왈패들이 행패를 부리면 그저 허허 웃으며 막걸리 한 사발을 내어주는, 장터 바닥의 흔해 빠진 짚신 장수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사내의 손놀림은 어딘가 몹시 불안해 보였다. 삼줄기를 꼬아 넘기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의 시선은 자꾸만 장터 어귀의 비탈길을 향해 힐끔거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러운 장터의 풍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인영 하나가 비탈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빛바랜 옥색 쓰개치마를 푹 눌러쓴 여인이었다. 치맛자락의 끝은 낡아 해졌고 소매 깃에는 여러 번 기워 입은 흔적이 역력했지만,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는 그녀가 몰락한 사대부 가문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밥벌이를 위해 삯바느질거리를 구하러 십 리나 떨어진 양반촌과 장터를 오가는 그녀의 사연은 이미 저잣거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사내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기품 있는 자태나 처량한 신세가 아니었다. 흙바닥을 딛고 있는 여인의 발이었다.
'어찌 저리 고운 발로 이 험한 진흙탕을 밟는단 말이냐. 무명 천으로 덧대고 덧댄 버선조차 다 해져서, 짚신 바닥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가지 않았느냐. 저러다 날카로운 돌부리에라도 채이면 필시 피를 볼 터인데….'
사내의 가슴속에서 묵직한 돌덩이가 얹힌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가세가 기울었다 한들, 평생 흙 한 번 제대로 밟아보지 않았을 반가(班家)의 아기씨가 저런 험한 신을 신고 걷는다는 것이 못내 시리고 아팠다. 사내는 자신이 며칠 밤을 새워가며 정성껏 삼아둔 짚신 무더기를 뒤적였다. 빳빳한 짚의 억센 부분을 모두 잘라내고, 가장 부드러운 속대만을 골라 촘촘하게 엮어낸, 웬만한 비단 가죽신보다도 발이 편안할 최고급 짚신이었다. 오직 저 여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홀로 지어둔 것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내의 난전 앞을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위태로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끊어질 듯 덜렁거리는 짚신 뒷코가 사내의 인내심을 기어이 끊어놓고 말았다. 사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짚신 한 켤레를 여인의 발치로 툭 던졌다. 흙바닥에 가볍게 뒹군 새 짚신이 여인의 발끝에 멈춰 섰다.
"그거 신고 가시오."
갑작스러운 사내의 행동에 흠칫 놀란 여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쓰개치마 사이로 드러난 창백하고 선이 고운 얼굴이 천천히 사내를 향했다. 경계심이 어린 맑고 단단한 눈동자가 사내의 시선을 옭아맸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지만, 겉으로는 애써 무심하고 퉁명스러운 척 짚단을 만지작거렸다. 여인의 시선이 발치에 놓인 윤기 흐르는 새 짚신과 사내의 얼굴을 번갈아 향했다.
"내게 이 귀한 신을 살 돈이 없다는 것은 자네도 익히 알 터인데, 어찌 나에게 신을 내어주는 겐가?"
여인의 음성은 가야금 줄처럼 차분하고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대부의 자존심은 서릿발처럼 꼿꼿했다. 동정 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사내는 다급한 마음에 변명거리를 찾으려 뇌를 굴렸다. 하지만 한평생 글공부라고는 해본 적 없는 거친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투박하고 날 선 저잣거리의 언어뿐이었다.
"아, 돈이 없으면 외상으로 가져가면 될 일 아니오. 발가락이 다 부르터서 버선 밖으로 핏물이 밴 것이 내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고고한 양반 체면에 맨발로 저잣거리를 누빌 작정이시오? 신발 장수 눈앞에서 헐벗은 발로 걷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오!"
"외상이라니. 내일의 끼니조차 기약할 수 없는 처지에 갚을 길 없는 빚을 지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네. 자네의 그 따뜻한 마음 씀씀이는 고맙게 받겠으나, 이 신은 거두시게."
여인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려 했다. 이대로 그녀를 보내면 다음번에 나타날 때는 기어이 피투성이가 된 발로 나타날 것이 뻔했다. 안타까움과 초조함이 뒤섞여 끓어오르자, 사내의 이성이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녀를 멈춰 세워야 한다는 생각 하나에 사로잡혀, 평소 왈패들에게나 쓰던 상스럽고 거친 농담이 여과 없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거 참, 양반 체면 따지다 사람 잡겠네! 아, 돈이 없으면 나중에 몸으로라도 갚으면 될 거 아니오! 신발 값 핑계로 다 망해가는 양반댁 아기씨 손목이라도 한번 잡아보려 치근덕대는 거니까, 잔말 말고 그냥 신고 가란 말이오!"
말을 뱉어놓고도 사내는 아차 싶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변 난전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조차 사내의 불경스러운 입방정에 놀라 힐끔거리며 정적을 만들었다. 아무리 몰락했어도 뼈대 있는 사대부의 여식이다. 필시 모욕감에 치를 떨며 관아에 고발하겠다 호통을 치거나, 당장 뺨이라도 올려붙일 것이라 여겼다.
'미친놈, 등신 같은 놈. 걱정되는 마음을 어찌 그리 천박하고 비루하게밖에 뱉어내지 못하느냐. 이제 아기씨는 두 번 다시 내 난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시겠지.'
사내는 질끈 눈을 감으며 다가올 불호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뺨에 닿는 매서운 손길도, 분노에 찬 호통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뜬 사내의 시야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여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가만히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 깊은 곳에 묘한 이채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며칠 전부터 장터를 오갈 때마다 자신의 낡은 발끝을 안타깝게 좇던 사내의 조심스러운 시선을, 눈치 빠른 여인이 모르고 있었을 리 만무했다. 거칠고 불량한 말본새와는 달리, 새빨갛게 달아오른 사내의 두 귀와 안절부절못하는 투박한 손가락은 그가 숨기지 못한 서툰 순정을 고스란히 폭로하고 있었다.
"몸으로 갚으라… 하였는가?"
"그, 그렇소! 이 돌석이 놈, 평생 남들 발밑이나 닦아주며 짚신이나 팔다 흙구덩이에 파묻힐 운명인데, 이리 예쁘고 고귀한 양반댁 아기씨가 훗날 몸으로 빚을 갚겠다 약조만 해주신다면, 그깟 짚신 백 켤레 천 켤레인들 못 내어주겠소?"
사내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고 물러설 곳 없이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인은 말없이 발치에 놓인 짚신을 내려다보았다. 삼줄기를 엮은 솜씨가 어찌나 정교한지 보통의 거친 짚신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부드럽게 다듬어진 결에서 사내가 밤새 들였을 노고와 은밀한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지어진 신발. 세파에 시달려 얼어붙었던 여인의 마음 한구석에 낯선 온기가 스며들었다. 창백했던 여인의 입가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옅고 은밀한 미소가 번졌다 사라졌다.
"좋네. 그 외상, 기꺼이 달아두시게."
"…예? 지, 지금 뭐라 하셨소?"
"앞으로 내 신이 닳아 없어질 때마다 자네를 찾아와 새 짚신을 가져갈 테니, 빚의 명부를 장부에 단단히 적어두라는 말일세. 훗날, 자네가 겁 없이 내뱉은 그 거친 농담의 대가가 얼마나 무겁고 혹독한지 똑똑히 치르게 해줄 터이니, 부디 그날까지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시게."
여인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사내가 던져준 짚신에 조심스레 발을 밀어 넣었다. 맞춘 듯 꼭 맞는 짚신이 상처투성이인 여인의 발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여인은 사내에게 짧은 목례를 남긴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내는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장난이자 억지로 뱉은 말이었으나, 덜컥 그 발칙한 제안을 받아들인 여인의 진짜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신이 닳을 때마다 다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눈에 새기며, 사내의 거칠고 메마른 가슴속에는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봄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2: 닳아가는 짚신, 깊어지는 연정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살을 에이는 듯한 찬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매서운 초겨울이 도래했다. 장터의 흙바닥은 딱딱하게 얼어붙었고, 상인들은 저마다 화로를 끼고 앉아 언 손을 녹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여인은 짚신이 닳아 바닥이 헤질 때마다 어김없이 사내의 난전을 찾아왔다. 무거운 비단 더미를 이고 삯바느질 거리를 배달하러 십 리 밖 양반촌의 자갈길과 산길을 매일같이 걸어 다니는 탓에, 그녀의 짚신은 보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금세 닳아빠지기 일쑤였다. 사내는 여인이 올 때마다 미리 장터 가장 안쪽,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구석 자리에 깨끗한 거적을 깔아두고 그녀를 맞이했다.
"쯧쯧, 아무리 살림살이가 팍팍하고 고되다 해도 그렇지. 걸음걸이를 어찌 걷기에 한 달도 안 되어 신발 앞코가 죄다 터져 나간단 말이오. 오늘로 벌써 스무 켤레째요. 빚이 산더미같이 쌓이고 있는데, 나중에 어찌 몸으로 다 감당하려 이리 무모하게 구시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거친 타박과 방정을 늘어놓았지만, 사내의 손길은 천하의 귀한 옥구슬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사내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꽁꽁 얼어붙어 붉게 달아오른 여인의 발을 자신의 투박하고 커다란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얼음장같이 차갑고 딱딱해진 여인의 발에, 짚을 꼬느라 피가 돌고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사내의 체온이 닿는 순간이었다. 여인은 마치 불에 데인 듯 흠칫 놀라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사대부의 법도대로라면 외간 사내, 그것도 천한 신분의 장사치에게 맨발에 가까운 버선발을 내어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수치이자 파렴치한 짓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어느새 이 투박한 사내와의 만남을, 이 은밀하고도 묘한 의식을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차가운 세상의 지독한 멸시와 굶주림 속에서, 오직 이 사내만이 자신을 빚쟁이가 아닌 여인으로, 존중받아야 할 사람으로 온전히 대접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칠기가 늙은 소나무 껍질 같고 두껍기가 곰의 앞발 같은 손인데… 어찌 이리도 사무치게 따뜻할까. 내 발을 쥐고 있는 이 사내의 손끝이 이토록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은 정녕 추위 때문일까, 아니면 나를 향한 그 끓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일까….'
여인은 낡은 쓰개치마 사이로 사내의 넓고 다부진 어깨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굳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여인의 낡아빠진 버선을 조심스레 벗겨내었다. 작고 하얀 발등 위로 푸른 핏줄이 선명하게 비쳤고, 여기저기 험한 길을 걷다 돌에 긁힌 상처와 굳은살이 잡힌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상처들을 마주할 때마다 사내의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사내의 두꺼운 엄지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여인의 매끄러운 발등과 복사뼈 근처를 천천히, 아주 짙게 쓰다듬었다. 거친 굳은살이 여리고 부드러운 피부를 쓸고 지나가는 순간, 찌릿하고 강렬한 마찰열이 두 사람의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발이… 꼭 죽은 사람처럼 얼음장이오. 이러다 동창이라도 걸리면 발가락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르오. 내 다음에 올 때는 속 안에 짐승 털을 덧댄 따뜻한 동구를 만들어 둘 터이니, 제발 그 험한 산길은 피해서 다니시오."
사내의 목소리는 평소의 왈가닥 같던 톤에서 벗어나, 짙게 가라앉아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여인의 발바닥 아치를 부드럽게 지압하듯 문지르자,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얕은 신음을 흘릴 뻔한 것을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참아냈다.
"그렇게 털까지 덧댄 신을 내어주면, 내게 달아둘 빚이 또 두 배로 늘어나는 셈이군."
"그러게 내가 진작에 빚을 갚겠다 서둘러 나서지 그랬냐 하지 않았소. 벌써 짚신만 스무 켤레가 훌쩍 넘었소. 이쯤 되면 그 잘난 양반댁 아기씨 몸뚱어리를 통째로 넘기고도 모자라, 평생 내 방구석에 틀어박혀 내 시중이나 들어야 할 판이오."
"걱정 말게. 내 머릿속에 그 빚, 이자까지 쳐서 한 푼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셈해두고 있으니. 자네야말로 내가 그 빚을 한꺼번에 갚겠노라 들이닥치는 날,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지나 않기를 바랄 뿐이네."
여인의 평온한 듯한 목소리 이면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 있었다. 사내의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발등에 닿을 때마다, 그녀의 뱃속 깊고 은밀한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묵직한 열기가 피어올라 온몸을 녹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새 짚신에 여인의 발을 밀어 넣으며 짐짓 딴청을 피웠다.
'미치고 팔짝 뛰겠군. 이 작고 고운 발을 내 손안에 조금만 더 쥐고 있다가는, 이성이 끊어져 이대로 저잣거리 바닥에 눕혀두고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겠어. 어찌 사람의 살결이 이리도 부드럽고 향기로울 수 있단 말인가.'
사내는 서둘러 손을 떼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맞닿았던 피부의 여운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고, 사내의 하반신에는 이미 주체할 수 없는 피가 몰려 뻐근해져 있었다. 여인 역시 발등에 남은 사내의 뜨거운 온기를 느끼며, 치맛자락을 꽉 쥐어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일 모레면 하늘에서 큰 눈이 내린다 하오. 양반들 비단옷 삯바느질도 좋지만, 빙판길에 넘어져 뼈라도 상하면 큰일이니 당분간은 그 찬 방구석에 가만히 웅크리고 계시오."
"나를 걱정하는 겐가, 아니면 내 몸에 흠집이라도 나면 자네가 나중에 취할 그 '빚'의 가치가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겐가?"
"…둘 다요. 그러니 내 귀한 빚쟁이 몸뚱어리,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게 간수 잘하시오."
여인은 풋, 하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가문이 몰락하고 부모를 잃은 이후,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웃어본 적 없던 그녀였다. 얼어붙은 장터의 공기를 녹이는 듯한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에, 사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잠시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뒤돌아 걸어가는 여인의 발걸음은 사내가 정성껏 지어준 새 짚신 덕분에 한결 가볍고 경쾌해 보였다. 사내는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이 완전히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며, 불끈 쥔 주먹 안으로 차가운 땀을 쥐었다. 장난과 허세로 시작된 기묘한 거래였지만, 사내의 투박한 가슴속에 자리 잡은 맹렬한 연정은 이미 이성을 태워버리고 남을 만큼 거대한 불길로 번져가고 있었다.
※ 3: 산더미 같은 빚, 밤봇짐을 싼 아기씨
해가 바뀌고 길었던 겨울의 끝자락, 얼어붙었던 땅이 녹으며 봄꽃의 망울이 흐드러지게 맺힐 무렵이었다. 장터에는 며칠째 짚신 장수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매일같이 낡은 쓰개치마를 두르고 삯바느질을 핑계 삼아 장터 어귀를 서성였지만, 사내가 웅크리고 앉아 짚을 꼬던 그 자리에는 낯선 옹기장수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비워진 자리는 여인의 마음에 싸늘한 구멍을 뚫어놓았다.
"글쎄, 그 돌석이 놈이 며칠 전에 고리대금업자 밑에서 일하는 왈패 놈들이랑 시비가 붙었다지 뭔가. 양반댁 가마가 지나가는데 늦게 엎드렸다고 가마꾼들이 매질을 하려는 걸, 돌석이가 가로막고 나섰다잖아. 아주 뼈도 못 추리게 흠씬 두들겨 맞고 제집으로 실려 갔는데, 사흘 밤낮을 피를 토하고 숨만 겨우 붙어있다는구먼."
"쯧쯧, 천한 놈이 주제를 모르고 양반들 일에 끼어들더니 명줄을 재촉했지. 아마 내일 아침이면 거적때기에 말려 뒷산에 버려질지도 몰라."
장터 사람들의 무심한 수군거림을 전해 들은 여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날카로운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바보 같고 미련한 사내. 늘 내 발의 작은 생채기 하나까지 걱정하며 화를 내더니, 정작 제 몸뚱어리가 부서지는 것은 하나도 돌보지 않았단 말인가. 나를 위해 그 거친 입술로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막아내려 하더니, 결국 이리 허망하게 부서지고 말았단 말인가.'
여인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밤이 이슥해져 사방이 먹물처럼 캄캄해지자, 그녀는 오랫동안 다락방 깊숙한 곳에 모셔두었던 작은 보따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본가에서 야반도주하듯 도망쳐 나올 때 유일하게 챙겨 나왔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인 비취 패물과 가문의 오래된 상단 서책들이 담긴 보따리였다. 양반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비상금이 담긴 그 보따리를 단호한 손길로 둘러맨 여인은, 칠흑 같은 밤길을 나섰다.
사내의 집은 마을 어귀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인적 드문 외딴 산기슭의 다 허물어져 가는 초가집이었다. 달빛조차 먹구름에 가려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마당에 들어선 여인은 조심스레 방문 앞을 서성였다. 구멍 난 창호지 너머 방 안에서는 짐승의 앓는 소리 같은 무겁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간헐적인 밭은기침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문고리를 꽉 움켜쥐었다.
"누, 누구요…. 이 밤중에 뉘시길래 남의 집 문 앞을… 쿨럭!"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방 안쪽 어둠 속에 웅크려 있던 사내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구름이 걷히며 쏟아진 달빛을 등지고 선 여인의 갸름한 실루엣이 문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사내는 열에 들떠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통 피멍이 들고 뼈가 부러진 듯한 몸은 쉽게 말을 듣지 않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기씨…? 허억, 아기씨가 정녕 맞으시오? 이 오밤중에 예까지 어인 일이시오… 귀신을 보는 것인가…."
여인은 아무런 대답 없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더니, 등 뒤로 조심스레 방문을 닫아걸었다. 달칵, 하고 녹슨 나무 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의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좁고 습한 방 안에는 묵은 짚풀 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사내의 짙고 묵직한 체취가 어지럽게 가득했다. 여인은 방바닥에 널브러진 사내의 머리맡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창틈으로 비친 사내의 얼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멍투성이에 엉망진창이었고, 찢어진 입술 사이로는 굳은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어찌 이리 미련하고 바보 같은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살려달라 빌 것이지,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맞고만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리 목숨을 내던졌는가!"
여인의 서늘하고 고운 손이 사내의 땀방울이 맺힌 뜨거운 이마와 찢어진 뺨에 조심스레 닿았다. 사내는 불에라도 덴 듯 흠칫 놀라며 벽 쪽으로 몸을 거칠게 물렸다.
"손대지 마시오! 더럽고 누추한 곳이오. 어서, 어서 돌아가시오! 이런 야심한 밤에 처녀의 몸으로, 그것도 귀한 양반댁 여식이 천것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행여나 남들 눈에 띄어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러시오! 당장 나가시오!"
"소문? 체면? 그깟 껍데기뿐인 양반 체면 따위, 자네에게 짚신을 외상으로 얻어 신으며 농지거리를 주고받던 그날부터 이미 저잣거리 흙바닥에 내다 버렸네."
여인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다가가 사내의 흔들리는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품에 꽉 안고 있던 보따리를 방바닥 한쪽에 툭 내려놓더니,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쓰개치마를 벗어 내렸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까만 머릿결과, 눈이 시리도록 하얀 목선이 어스름한 달빛 아래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내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그 압도적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여인이 뿜어내는 숨 막히는 고혹적인 자태 때문인지 사내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가며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로 자네에게 진 빚이 짚신 마흔아홉 켤레, 털을 덧댄 덧신 세 켤레에 달하더군."
여인의 두 손이 이번에는 자신의 저고리 옷고름으로 천천히 향했다. 매듭을 꽉 쥐고서 아주 느릿하게, 짐짓 도발적인 손길로 풀어내는 그녀의 움직임에 사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세차게 흔들렸다.
"아, 아기씨…!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당장 그 손 멈추지 못하겠소! 제발… 제발 이러지 마시오. 내가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오!"
"밀린 빚을, 오늘 밤 모두 치르러 왔네."
"뭐, 뭣이…?"
"돈이 없으면 몸으로 갚으라 하지 않았나. 이 몸뚱어리를 통째로 넘기고 평생 방구석에 틀어박혀 시중을 들라 하지 않았던가. 사내대장부가 제 입 밖으로 내뱉은 그 무서운 약조를, 이제 와서 비겁하게 주워 담을 텐가?"
툭, 하고 마침내 저고리 고름이 완전히 풀리며 하얀 동정이 사르르 벌어졌다. 뽀얀 목덜미 아래로 얇은 속적삼에 덮인 은밀하고 풍만한 살결의 굴곡이 비치자, 사내는 미칠 것 같은 갈증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멈추었다. 여인은 흐트러진 옷매무새 그대로 사내의 무릎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여인의 체온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하고 아찔한 난초 향이 방 안의 피비린내를 단숨에 밀어내고 사내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잘 들으시게. 이제부터 내가 이 좁아터진 집의 안방을 온전히 차지할 참이니. 내 몸과 내 평생을 온전히 거두어 그 산더미 같은 빚을 탕감하고 나를 안을지, 아니면 이대로 쫓아내어 평생 나를 잃고 후회 속에서 죽어갈지, 지금 당장 자네가 선택하시게."
여인의 눈빛에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눈앞의 사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지독한 열망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사내는 극도의 당혹감과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수컷으로서의 짙은 욕망 사이에서, 덜덜 떨리는 두꺼운 손을 뻗어 여인의 가녀린 어깨를 부서질 듯 꽉 감싸 쥐었다.
'이 여인이 정녕 미친 것인가. 나 같은 벌레만도 못한 놈에게 제 발로 찾아와 이토록 고귀한 모든 것을 내어놓겠다니…. 그래, 천벌을 받아 죽는다 해도 나는 오늘 이 여인을 절대 놓을 수 없다.'
사내의 거칠고 뜨거운 손길이 어깨에 닿자마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으며 사내의 넓고 단단한 품으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두 사람의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좁고 어두운 방 안에서 농밀하게 얽혀들며, 서로의 상처를 탐욕스럽게 핥아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찔하고 치명적인, 빚을 담보로 한 두 남녀의 완벽한 첫날밤이 폭풍처럼 시작되고 있었다.
※ 4: 좁은 방안의 숨막히는 첫날밤
거칠고 투박한 사내의 품 안으로 고귀한 여인의 가녀린 몸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얼음장처럼 차갑던 초가집 방안의 공기가 일순간 화염에 휩싸인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구멍 난 창호지 너머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귀곡성처럼 울부짖고 있었지만, 좁고 어두운 방 안을 가득 채운 두 사람의 얽힌 숨결 앞에서는 그 어떤 시린 바람도 감히 침범할 수 없었다. 사내는 자신의 품에 꽉 안긴 여인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감히 으스러지게 안을 수도 그렇다고 이대로 놓아버릴 수도 없는 아득하고도 미칠 것 같은 혼란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평생을 흙먼지 날리는 저잣거리 바닥을 구르며 사람들의 발밑에서 천대와 멸시만 받고 살아온 자신의 비루한 생애에, 이토록 눈이 시리게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모든 것을 내어주려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한낱 허황된 꿈결처럼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여인의 저고리 옷고름이 풀어진 틈새로, 어스름한 달빛을 받은 희고 매끄러운 목덜미와 속적삼 아래로 비치는 은밀한 살결이 사내의 굶주린 시선에 고스란히 닿았다. 사내는 타들어 가는 갈증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왈패들에게 두들겨 맞아 성한 곳 하나 없이 피멍이 들고 찢겨나간 자신의 투박한 두 손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두려움과 경외심, 그리고 더는 억누를 길 없이 폭발해버린 사내로서의 원초적인 욕정이 뒤섞인 채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이 여인의 서늘한 뺨에 닿았다.
'어찌하여 나 같은 버러지만도 못한 놈에게 이리도 눈부신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가. 이대로 당신의 그 고운 살결에 내 더러운 생채기를 남기고 안아버리면, 나는 평생 당신이 쳐놓은 그 아름다운 덫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노예가 될 터인데. 허나, 내 기꺼이 그 지옥 같은 천국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겠소.'
사내의 거칠고 두꺼운 엄지손가락이 여인의 고운 턱선을 따라 조심스레, 그러나 짙은 열기를 품고 미끄러져 내렸다. 여인은 그 투박하고 상처투성이인 손길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살짝 기울여 사내의 거친 손바닥 안으로 자신의 체온을 깊숙이 묻어왔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사내의 끓어오르는 온기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그녀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이 돌석이 놈, 평생을 짐승처럼 엎드려 살아왔소. 아기씨처럼 귀하고 어여쁜 분을 어찌 다뤄야 할지 그 법도를 몰라, 내 이 투박하고 거친 손길에 아기씨의 옥 같은 몸에 멍울이라도 남길까… 그것이 미치도록 두렵소."
사내의 피딱지가 앉은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방 안의 무거운 정적을 가르며 낮게 울려 퍼졌다. 십수 년간 억눌러왔던 비천한 신분의 서러움과, 여인을 향한 깊고도 맹렬한 애정이 짐승의 울음처럼 뒤엉킨 애절한 고백이었다. 여인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떠,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붉게 핏발이 선 사내의 짐승 같은 눈동자를 깊고 고요하게 응시했다. 그 눈빛 속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단단한 결의와, 사내의 모든 상처를 기꺼이 껴안겠다는 짙은 연모의 정이 폭풍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상처라면, 이미 세상의 모진 풍파와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베일 대로 베이고 찢겨나갔네. 이제 내게 남은 유일한 구원은, 자네가 내 시린 발에 묵묵히 신겨주던 그 따뜻한 짚신 한 켤레의 온기뿐이니, 부디 나를 깨질 듯한 도자기처럼 조심스레 대하지 말게. 나는 오늘, 채권자에게 산더미 같은 빚을 갚으러 온 가장 비천하고 탐욕스러운 채무자일 뿐이야."
여인은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두꺼운 목에 두 팔을 거칠게 감아쥐고는, 그의 상처 난 입술로 맹렬하게 다가갔다. 차갑고도 한없이 부드러운 여인의 입술이 사내의 메말라 갈라지고 피비린내가 나는 입술에 맞닿는 순간, 사내의 머릿속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성이라는 얇은 끈이 속절없이, 아주 완벽하게 끊어져 나갔다. 사내는 더 이상 주저하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여인의 가는 허리를 자신의 넓은 품 안으로 부서져라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동안 짐승처럼 억눌러왔던 모든 갈증을 단숨에 해소하려는 듯 깊고 뜨거운 입맞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고 혀가 얽힐 때마다 짙고 농밀한 숨소리가 좁은 방안을 어지럽게 채우며 공기를 태워버릴 듯 달구었다. 사내의 크고 뜨거운 두 손이 여인의 얇은 속적삼을 단숨에 벗겨내고, 부드러운 능라 비단 같은 여인의 굴곡진 나신 위를 굶주린 들짐승처럼 거칠게 더듬어 내려갔다.
여인은 사내의 압도적인 덩치와 서툰 열정에 휩쓸려 숨이 멎을 듯한 쾌락을 느끼면서도, 그의 넓고 흉터투성이인 등판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녀의 섬세한 손끝은 사내가 온몸으로 받아냈을 수많은 매질의 흉터와 굳은살들을 하나하나 가만히 쓸어내리며 무언의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천한 짚신 장수의 거칠고 단단한 근육과, 몰락했으나 여전히 고귀함을 잃지 않았던 규수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살결이 온전히 맞닿아 빚어내는 마찰열은, 기어이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불길로 번져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낡아빠진 이부자리가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흔들리고, 사내의 거친 콧김과 뜨거운 땀방울이 여인의 목덜미와 귓불을 붉게 달구어놓았다. 여인은 달아오르는 숨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내의 어깨를 꽉 쥐며 활처럼 허리를 휘었다. 한평생 닿을 수 없을 평행선 같았던 두 사람의 아득한 신분의 벽은, 좁고 허름한 초가집 방안에서 얽혀드는 육체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형체도 없이 완벽하게 허물어져 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욕정의 해소가 아닌, 기나긴 시간 동안 서로를 향해 켜켜이 쌓아 올린 지독한 연모와 목숨을 건 완전한 결합이었다.
※ 5: 규수의 숨겨진 지략과 반전
구멍 난 창호지 틈새로 스며드는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어지러운 흔적들로 가득한 방 안을 서서히 밝히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이어진 격정적이고도 폭풍 같았던 시간의 여운이 아직 온전히 가시지 않은 방 안에는, 묘한 나른함과 짙은 살내음이 섞여 감돌고 있었다. 사내는 새벽이 밝아오기 전 일찌감치 눈을 떴지만, 자신의 굵은 팔을 베고 새근새근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여인의 얼굴을 혹여나 깨울까 두려워,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가만히 천장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정녕 허황된 꿈은 아니겠지. 내가 잠시 미쳐 헛것을 본 것은 아니겠지. 조선 팔도에서 가장 못나고 천한 짚신 장수 놈이, 감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고귀한 양반댁 아기씨를 밤새 품에 안고 뒹굴다니.'
사내의 갈라진 입가에 바보 같은 헛웃음이 실없이 번져갔다. 어젯밤 짐승처럼 날뛰었던 자신의 흔적으로 온통 붉은 자국이 남은 여인의 가녀린 목덜미와 어깨를 보며, 사내는 자신의 비루하고 투박한 삶에 기적처럼 깃든 이 과분한 축복에 남몰래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그때, 사내의 품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여인이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부스스하게 엉킨 머리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는 그녀의 눈빛은, 간밤에 사내의 품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하고 나약한 여인의 그것이 전혀 아니었다. 밤사이 뜨겁게 타올랐던 열기를 차갑게 식히고 다시금 맑고 단단한 이성을 되찾은, 기품 있고 지략이 넘치는 사대부 가문의 지혜로운 여식 그 자체로 돌아와 있었다. 여인은 홑이불을 끌어당겨 가슴을 가린 채, 사내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상태로 나직하지만 뼛속까지 울릴 만큼 단호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그동안 밀렸던 짚신 빚은 간밤에 내 몸뚱어리로 남김없이 다 청산하였으니, 이제부터 우리 둘 사이에 새로운 거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차례군."
"거, 거래라니요? 아니, 아기씨와 나 사이에 도대체 짚신 빚 말고 또 무슨 셈할 것이 남았단 말이오? 나는 이제 아기씨가 내 곁에 숨 쉬어주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소이다!"
사내가 당황하여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여인은 부드럽지만 강압적인 손길로 사내의 가슴팍을 지그시 눌러 제지했다. 그녀는 몸을 비스듬히 일으켜 세우고는, 어젯밤 방 한구석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던 작은 봇짐을 자신의 무릎 앞으로 끌어당겼다. 여러 겹으로 단단하게 싸인 무명천의 매듭을 하나씩 풀자, 그 안에서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는 최고급 비취 비녀와 두툼한 은가락지 쌍, 그리고 모서리가 닳고 빛바랜 두꺼운 서책 여러 권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사내는 평생 장터 바닥을 구르며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그 어마어마하고 귀한 패물들을 보고 두 눈이 화들짝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게 다 무엇이오? 가세가 다 기울어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삯바느질을 하신다더니, 어찌 이리 눈이 돌아갈 만큼 귀한 물건들을 여태 꽁꽁 숨겨두고 계셨소?"
"내 어머니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남겨주신 비상금이요, 호신부 같은 것들이지. 그동안 아무리 배가 고파 내장이 뒤틀리고 한겨울에 얼어 죽을 고비가 와도, 정녕 내 목숨과 인생을 통째로 걸어야 할 완벽한 판돈이 생기기 전까지는 절대 쓰지 않으려 독하게 품고 있었네. 허나, 이제 그 판돈을 걸 때가 온 것이야."
여인은 무더기 속에서 가장 낡은 서책을 한 권 펼쳐 사내의 코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그것은 일반 서책이 아니었다. 조선 팔도의 모든 상로(商路)와 특산물, 객주의 위치와 은밀한 거래 장부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상재(商材)에 관한 전설적인 비서(祕書)였다. 여인의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고 총명하게 형형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장터를 오가며 숨죽여 자네를 지켜보았네. 장터 바닥을 구르는 수많은 장사치와 왈패들 중에서도, 자네처럼 요령을 피우지 않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일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지. 자네가 밤을 새워 만든 짚신은 언제나 올이 곧고 튼튼하여, 자네의 그 무식할 정도로 거친 손마디만큼이나 믿음직스러웠어. 무엇보다 양반의 권위 앞에서도 불의를 참지 않고 가로막아선 그 무모한 배짱 하나만큼은, 거상을 이끌 상단의 행수로서 아주 훌륭한 자질이지. 나는 자네의 그 단단한 심지와 꺾이지 않는 끈기를, 나의 치밀한 지략과 이 거대한 자본에 결합시키려 하네."
"지, 지략이라니요… 행수라니요? 설마 지금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나더러 짚신장수 때려치우고 큰 장사를 하라는 말씀이오?"
"그렇네. 이 값비싼 패물들을 당장 밑천으로 삼아, 이제 짚신 나부랭이가 아닌 명나라의 최고급 비단과 조선 제일의 인삼을 대규모로 팔러 다닐 걸세. 나는 골방에 앉아 글을 읽고 셈을 하여 상단의 모든 길을 터줄 것이고, 자네는 그 거대한 체구와 세상물정에 밝은 눈으로 상단 무리를 이끌고 현장을 호령하는 행수가 되는 것이지. 자네가 내게 툭 던져주었던 그 따뜻한 새 짚신처럼, 이제는 우리가 함께 비단 신을 지어 신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걸어보는 것이야. 어떤가? 한평생을 바쳐 나라는 독한 상전을 모시며, 내 수족이 되어 조선 팔도의 떼돈을 쓸어 담아보겠는가?"
사내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말문이 막혀버렸다. 자신은 그저 가난하고 서툰 연정으로 짚신이나 내어주며 속을 끓였을 뿐인데, 눈앞의 이 비상하고 무서운 여인은 낡은 짚신 한 켤레 속에서 사내의 진짜 가치를 꿰뚫어 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일생일대의 거대한 도박을 치밀하게 준비해왔던 것이다. 헐벗고 가녀린 규수의 연약함 뒤에 그토록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거대한 포부와 강인함에, 사내는 완전히 넋을 잃고 압도당하고 말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사내는 이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방이 떠나가라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를 쥐고 흔들 듯한 맹렬하고도 통쾌한 사내의 웃음소리가 초가집의 차가운 아침 공기를 시원하게 갈라버렸다.
"하하하! 좋소! 뼈대 있는 양반댁 아기씨가 까짓거 시키는 대로, 이놈이 다 해드리지요. 내 이 거칠고 억센 몸뚱어리 하나 짐승처럼 바쳐서라도, 아기씨 발끝에 진흙 한 방울 안 묻히게 세상에서 제일가는 비단 꽃신을 신겨드리겠소! 내 당장 내일부터 상단을 꾸리겠소이다!"
※ 6: 짚신 장수에서 거상으로
그 거침없던 맹세가 있고 난 뒤로부터 십수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다. 한양 도성 한복판,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기와집 앞에는 연일 청나라에서 들여온 진귀한 물건과 명주 비단을 가득 실은 거대한 상단의 수레가 끊임없이 드나들며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흙먼지가 날리는 시골 저잣거리 구석에 거적때기를 깔고 앉아 짚신이나 엮어 팔던 천덕꾸러기 짚신 장수 사내는, 어느새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막대한 부를 거머쥔 조선 팔도 으뜸의 거상(巨商)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상단의 중심에서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그의 곁에는, 늘 얼음장 같은 냉철한 판단력과 귀신같은 상술로 상단의 굵직한 셈을 통제하고 결정을 돕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안주인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그 옛날, 짚신 빚을 몸으로 갚겠다며 작은 밤봇짐 하나만 달랑 싸 들고 쓰러져가는 초가집을 찾아왔던 몰락한 양반가의 그 지독한 규수였다.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거대한 상단을 일구어낸 두 사람의 찰떡같은 궁합과 눈부신 성공 스토리는, 한양 바닥에서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자 전무후무한 야담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최고급 비단과 화려한 자개장으로 꾸며진 넓은 안방, 부드러운 사방침에 비스듬히 기대어 매서운 눈초리로 상단의 장부를 꼼꼼히 살피고 있던 여인 곁으로, 막 청나라 국경 근처에서 위험천만한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사내가 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십수 년이라는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사내의 머리칼에는 어느새 희끗희끗한 서리가 내렸지만, 값비싼 비단옷을 걸친 사내의 풍채는 그 옛날 장터에서보다 훨씬 더 늠름하고 거대해져 있었고, 여인은 세월을 비껴간 듯 여전히 우아하고 고혹적인 기품을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부인! 내 무사히 돌아왔소. 이번 의주 상인들과의 인삼 거래도, 출발 전 부인이 일러준 기막힌 수읽기 덕분에 저들의 뒤통수를 치고 수천 냥이 넘는 어마어마한 이문을 남겼소이다. 과연 내 부인의 머리를 당해낼 자는 조선 팔도에 없소이다!"
사내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품속 깊은 곳에서 조심스레 작은 비단 상자 하나를 꺼내어 장부 위에 엎드려 있는 여인 앞에 툭 내려놓았다. 숫자 무리에서 간신히 눈을 뗀 여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화려한 금박 자수와 영롱한 빛을 내는 남해안의 진주로 화려하게 장식된 최고급 당혜(唐鞋) 한 켤레가 고이 놓여 있었다. 여인의 작고 고운 발에 직접 치수를 맞춘 듯, 아주 앙증맞고 아름다운 비단 꽃신이었다. 여인은 짐짓 타박하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리도 비싸고 귀한 것을 또 굳이 구해 오셨습니까. 행수 어르신께서 출행을 나가실 때마다 사 들고 오시는 바람에, 바깥 신발장 안에 당신이 사 온 비단 신이 이미 서른 켤레가 훌쩍 넘습니다. 다 신지도 못할 것을 어찌 이리 낭비하십니까."
"허허, 겨우 서른 켤레가 대수요? 내 그 옛날 피비린내 나는 초가집 방구석에서 하늘에 대고 맹세하지 않았소. 평생 당신 고운 발에 냄새나는 진흙 한 방울 절대 안 묻히게 해주겠다고 말이오. 짚신을 엮던 내 거친 손으로, 언젠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비단 신을 끝도 없이 안겨주겠다 약조하지 않았소. 그나저나, 이 비단 꽃신 값이 천 냥은 족히 넘는데… 부인께서는 이 어마어마한 신발 값을 대체 어찌 치르실 작정이오?"
사내의 농염하고 짓궂은 물음에, 여인의 붉은 입가에 요염하고도 매혹적인 미소가 천천히 번져나갔다. 사내는 짐짓 상단의 대행수답게 근엄한 척 헛기침을 하며 거들먹거렸지만, 사랑스러운 여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내의 두 눈에는 십수 년 전 짚신을 내밀던 그 시절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달콤한 꿀이 뚝뚝 떨어질 듯한 깊고 애절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천 냥짜리 꽃신 값이라… 호오, 대행수 어르신, 아직도 이년에게서 그 옛날부터 받아내실 빚이 남았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동안 불려드린 재산만 해도 십만 냥이 넘거늘."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요! 당연하지 않소! 그 옛날 부인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내 짚신을 외상으로 가져가며 진 그 무시무시한 빚이, 십수 년간 이자가 복리로 불고 또 불어, 이제 이 거대한 상단을 통째로 넘기고 기둥뿌리를 다 뽑아도 턱없이 모자랄 판이오. 내 셈이 좀 철저해야지 않소. 그러니 어쩌겠소. 돈과 재물로 안 되면, 오늘도 그 옛날처럼 몸으로 갚으셔야지."
사내의 능글맞은 너스레에 여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청아하고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곱게 빗어 넘긴 머리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나, 사내의 듬직하고 태산 같은 품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볍게 안겨들었다. 사내는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서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듯 여인의 가는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그녀의 하얀 이마에 따뜻하고 짙은 입맞춤을 남겼다.
"좋습니다. 대행수의 셈법이 정 그러하시다면 기꺼이 따라야지요. 내 평생을 바쳐 그 엄청난 이자를 밤마다 차곡차곡 몸으로 갚아드릴 터이니, 당신은 죽는 그날까지 내 곁에서 장부 정리를 도우며 수족 노릇이나 철저히 하시지요. 알겠습니까, 나의 행수."
"분부대로 기꺼이 모시겠소이다, 나의 영원한 아기씨."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게 끌어안은 두 사람의 귓가로, 열린 창문 너머 한양 거리의 평화롭고 활기찬 풍경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신분의 거대한 벽과 찢어질 듯한 가난이라는 척박한 현실을 뛰어넘어, 오직 서로를 향한 단단한 믿음과 맹렬한 사랑 하나로 스스로의 운명을 완벽하게 개척해 낸 두 사람. 그들의 발밑에는 이제 발가락이 부르트던 낡아빠진 짚신 대신, 함께 피땀 흘려 일구어낸 눈부시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금빛 비단길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천한 짚신 장수와 몰락한 규수의 위험하고도 짜릿한 거래, 어떻게 들으셨나요? 낡은 짚신 한 켤레로 시작된 인연이 조선 최고의 거상 부부로 거듭나기까지, 두 사람의 과감한 선택과 애틋한 순정이 돋보이는 반전 로맨스였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꾹 눌러주시고, 다음에도 더 흥미진진한 조선 야담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